著書/선생출신(2010)

된장처럼 숙성하길

온달 (Full Moon) 2015. 4. 15. 08:12

된장처럼 숙성하길 

 

석현수 

나는 장을 담글 줄을 안다. 어쩌면 이것을 할 수 있는 몇 되지 않은 남성중 한 사람일 것이다. 출가한 딸들을 찾아갈 때는 아내와 멋진 파트너가 되어 된장을 담가주고 온다. 생수 몇 병 천일 염 몇 키로 그리고 망사천등을 준비하기도 하고 염도를 맞추기 위해 계란을 마지막으로 띄어보는 일까지 내 몫이다. 이러한 실력은 이곳저곳 뜨내기 생활에서 가장이 직접 생계에 관한 일을 아내와 같이 하다 보니 자연적으로 관숙이 되어버렸다. 

 

5인 가족이 두어해 동안 해외에서 버티려면 제일 먼저 풀어야 할 문제가 된장 간장 이었다. 출국 때 수녀원에서 만들어 파는 메주가루를 가지고 간다. 마음 같아서는 된장, 간장을 모두 가져가고 싶었지만, 무게와 부피도 장난이 아니거니와 더욱 곤란 한 일은 만약 세관에서 적발당할 경우 인정사정없이 모두 분쇄기 속으로 던져지기 때문에 하는 수 없이 현장 작업이 되어야 했다. 

 

서양 속담에 친구와 와인은 오래된 것일수록 좋다고 했다. 나는 와인대신 이 자리에 된장을 넣고 싶다. 숙성 과정을 거친다는 점에서야 와인이든 된장이든 다를 것이 없다. 오래된 와인이 좋다면 오래된 된장도 좋다. 머리를 다치면 우선 된장으로 응급치료를 하기도하고 10년이 넘은 것은 부은 부위를 가라앉히는 조약(造藥)으로 쓰기도 한단다. 아무튼 된장과 친구는 오래 될수록 좋다. 후일 평생 잊지 못할 우정의 반지를 건네준 미국친구가 나에게 베푼 첫 호의는 내가 된장을 만들 수 있도록 자기 집 헛간(shade)을 빌려주는 일로 시작된다. 

  

임시 살림으로 아파트에 살게 된 우리에게 제일 큰 고민거리는 된장이었다. 담그는 문제와 보관 문제였다. 그렇다고 냄새나는 물건을 집밖에 내다 놓고 이웃에게 고통을 줄 수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미국 친구의 신세를 졌다. 간장, 된장만큼은 친구의 헛간에 보관하고 수시로 들러 필요한 만큼씩 가져다 먹었다. 우리는 간간히 헛간에 들러 파리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그물망을 손질하기도 하고, 뚜껑을 열어 주기도 하는 등 공을 들였다. 어쩌면 된장 간장을 구실로 두 사람의 왕래가 더 잦아 졌을 것이고, 된장이 두 가족사이의 평화의 가교가 된 셈이다. 

 

다행한 일은 친구가 서로의 교분을 위해 한국 관련 서적을 많이 읽고 있어 한국 사람들의 주식이 쌀밥, 된장국, 김치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된장냄새를 그들의 고약한 치즈냄새에 비하기도 하여 서로 웃기도 하였다. 냄새야 특이했겠지만 된장 제조 과정을 옆에서 살펴보았기 때문에 위생에 전혀 의심을 가지지 않았으니 마치 몸에 좋다는 자연산 약재처럼 된장을 생각했다. 물론 친구 내외가 우리 집을 방문 할 때는 된장국을 먹었고 여름철 풋 고추 한 둘 정도는 쌈 된장을 만들어 같이 즐겼다.  

 

세상일이 공들이지 않아도 될 일이야 없겠지만 특히 사람과 사람의 사귐에 있어서는 된장처럼 천천히 숙성해 나가야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대개의 음식들이 숙성이란 기간을 거치지 않듯 인간관계도 즉흥적인 것이 너무 많다. 음식물이 손에서 바로 입으로 연결되듯 우리들의 사람사귀기는 한 끼의 외식 같은 맛으로 신속하고 편리해 한다. 그날의 선택이 곧 그날의 맛이 되고 기분이 된다. 그러나 된장은 적어도 3개월의 숙성기간을 거쳐야 하고, 메주는 갑갑한 방안에 두 달 여 곰팡이가 슬어야 하며, 소금 또한 정제한 소금보다는 바다 왕소금을 써야한다. 모든 것이 박자가 제대로 맞아야 한 해의 장을 담가내듯 오래갈 우정을 위해서는 시간을 두고 서로가 많은 공을 들여야 한다. 

 

친구는 누구든 좋을 것 같지만 대학 때 만난친구 보다는 고등학교에서 만난친구, 그 보다는 더 초등학교 친구가 더 좋단다. 마치도 숙성기간을 거치기 위해 오래 동안 사귀어 보라는 말처럼 들린다. 말〔馬〕의 능력을 알려면 먼 길을 가 보아야 하듯 친구도 오래 사귀어 보아야 그 진가가 나타나는 법이다. 친구의 됨됨이를 잘 볼 수 있는 길은 서로 이해관계가 있는 일에 대립해 보아야 알 수 있다고 하니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혹자는 고스톱 판에서 인간성을 점검해 보라는 귀띔을 주기도 한다.  

 

독일의 극작가 코체부(Kotzebue)는 우정은 순간이 피게 하는 꽃이며 시간이 익게 하는 과실(果實)이라고 했다. 처음 된장을 통해 꽃 피웠던 미국 친구와의 우정은 두 가족을 한 가족처럼 가깝게 만들어 주었고, 30년이란 세월이 흘러도 아직도 아름다운 인연이다. 된장과 친구는 오래 될수록 좋다. 와인 또한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