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이 바뀌었다
주인이 바뀌었다
석현수
이제 내가 주인이던 시절도 끝났다. 밖은 확성기 소리도 멎고 길을 가도 누구 하나 허리 굽혀 인사하는 사람도 없다. 엊저녁 6시 넘어 해가 빠져갈 때는 완연한 파장 분위기였다.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우리들이 그들의 무용담을 들어주는 일과 뜬 눈으로 밤 센 선거 운동원들이 사우나 가는 것과 청소부 아저씨들이 현수막의 잘난 얼굴들을 걷어내는 일이 남았다.
아무도 묻지 않아도 열심히 하겠노라 꾸벅 거리는 사람들 때문에 한 달여 큰 상전처럼 기분 좋게 지내왔는데 하루 밤 사이에 세상이 변해 버렸다. 옛날에는 당선사례 한답시고 선거 끝나고 바로 다음 날 하루쯤은 골목이 시끄러웠는데, 이제는 그런 위인도 없어졌다. 철저하게 경제 논리가 적용되는 모양이다. 이미 지출한 선거비용도 아까울 판에 고맙다는 말을 하기 위해 차를 빌려 타고 다닐 이유야 없을 것이며 그 시간이면 그 동안 못잔 잠이나 좀 자겠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겠는가. 아무리 바보 어부라도 잡은 물고기에게 다시 모이를 던지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한 달여 내가 쥐고 있던 투표 권한 행사가 드디어 그들에게 넘어갔다. 이튿날 아침신문에서 그 들의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부터 우리들은 화환을 목에 건 당선자들에게 머리를 숙이며 귀하신 분들로 정중히 모셔야 한다. 그들이 새로운 주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고 해서 평시에 너무 큰 소리 쳤다가는 이들에게서 미운 털만 박히게 된다. 나중에 보자는 말로는 4년 후 이맘때나 있을 일이어서 엄포 같지 않는 엄포일 뿐이며 효과도 없을 것이다.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등의 고급스런 용어들은 교과서적인 말일 뿐이어서 누구의 말인지 암기 과목에서나 틀리지 않도록 해야 하는 수능시험용이다.
주인도 아닌 것을 주인이라고 추켜올리는 것이 선거 때 말고도 여럿 있다. 당연한 말 같지만 생각해 보니 그럴 듯하다. 가장 흔한 거짓말은 사장이 이야기 하는 '회사가 전부 여러분들의 것'이라는 말이다. 실제로 회사의 소유주는 사장인데 어찌 직원이 주인이 될 수 있을 것인가? 그럼 주인인 직원이 사장이란 사람에게 봉급 주는 것을 본 적이 있다는 걸까? 학교에서도 마찬가지다. 학교에서는 늘 학생들이 주인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학생들은 주인이니까 돈도 안내고 학교에 와야 되지 않겠는가? 주인이 입장료를 내고 자기 집에 들어가는 일이 없다는 것을 생각해 보니 이 말 또한 이상하지 않는가.
가정에서도 주인 개념이 달라졌다. 옛날에는 남자는 밖에서 돈을 벌어오니 바깥주인, 여자는 안에서 살림을 사니 안주인이 되었다. 그러나 이런 생각 오래 하고 있다가는 시대에 뒤 떨어진다. 가정에서 돈의 쓰임세가 하도 많아 안 팍 내외가 팔을 걷어 부치고 벌지 않으면 웬만한 소비를 보장 받지 못하기 때문에 많은 젊은이들은 맞벌이를 한다. 그래서 안주인 바깥주인이 따로 없다. 아침에는 둘 다 나가야 하니 바깥주인, 해 빠지면 둘 다 들어와서 안주인이 된다. 앞치마는 벽에 걸어놓고 아내와 남편 혼용 부엌장구로 쓰고 있다. 가정도 조직도 여럿이 같이 밀고 나가야 하는 올 코트 푸싱 경기장이 되어간다. 둘이 해도 모자라는 살림살이를 명색이 책임을 맡았노라는 주인이 꿔다 놓은 보리자루 신세가 되어 버리면 집안 살림은 여간 어려위지는 것이 아닐 것이다.
당선된 사람들은 벽보에서 내려와 어느 덧 ‘어험’하고서 폼을 잡고 있는 듯하다. 쓰레기 통으로 던져진 수많은 명함들은 모두 구겨져 시들해 져 있으나 유난히 당선자 것만은 빛나 보인다. 이제 저 들을 한번 만나 보기 위해서는 여러 절차를 거쳐야하기에 누구며 용무는 무엇이라는 것을 소상히 밝혀야 하며, 시일이 상당히 걸린 후 겨우 몇 분 정도의 대화 시간을 허락 받을 것이다.
아침 신문에는 확정 당선자 소식과 함께 새로운 얼굴들이 환하게 웃고 있다. 유권자들은 주인 자리를 얼른 그들에게 내 주고는 전혀 서운한 기색도 없이 일찍 출근들을 하고 있다. 새로운 스타 탄생을 맞는 일로 세상이 떠들썩하더라도 부러워하지 않는다. 다만 새로 들어선 주인에게 살림살이 잘 해 주기를 바라는 희망을 걸 뿐이다. 바보 같은 사람들 앞에 너무나 화려하고 당당한 당선자들이다. 매스컴이 아무리 추켜세워 올린다 하더라도 저는 머슴이어서 진정한 주인들을 위해 ‘열심히 일 할 뿐입니다’라고 말하는 겸손한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감투를 빌려 온 처지여서 어깨가 무겁다는 것쯤은 알아야 할 것 같은데, 투표를 마친 하루 사이에 그런 생각하는 사람은 영 보이지 않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