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운한 몸살
개운한 몸살
석현수
2009년 춘천 마라톤으로 뜀박질은 그만둘 생각이다. 마침 올 가을 국내 유명선수 한 사람이 전국체전에서 뜀박질 생활을 마감하는 고별 마라톤을 했단다. 덩달아 나도 때가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해 행사를 기점으로 졸업하는 건데…….
지난해 춘천마라톤은 설렌 가슴에 밤잠을 설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경기를 포기하고 돌아와야 했다. 외지에서 갑자기 잠자리가 바뀐 탓도 컷을 것이다. 올해라고 긴장이 덜 하리란 법은 없었다. 아무튼 이번에도 충분한 숙면은 되지 못했으나, 지난 해 와는 달리 서너 시간은 잔 것 같아 용기 있게 출사표를 던졌다. ‘죽어도 자기 좋아하는 것 하다 죽으면 행복한 것이다’라는 극히 이기적인 생각이 한 몫을 했다.
인생의 긴 여정을 경험하는 것 같아서 사람들이 마라톤에 매력을 느낀다. 출발 선상에 있는 2만여 명의 달림이 들의 얼굴은 한결 같다. 누구하나 중간에 낙오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모두가 이를 악다물고 결의에 차 있어 출발 신호만 내리면 단숨에 달려 나갈 적토마 모습이다. 신호탄의 빨간 연막이 하늘로 솟구치면 우레 같은 함성으로 경기는 시작된다. 경기를 위해 적어도 몇 달은 연습을 해왔기에 초기 20키로까지의 거리에서는 대다수가 팔팔하다. 30키로가 넘으면서부터 발 움직임이 무뎌진다. 그리고 가끔씩 뒤를 돌아보며 뒤에 오는 사람들을 살피기도 한다. 공연한 고생을 사서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이번으로서 마지막이라는 각오를 다진다. 계산상으로 봐도 벌써 팔 십리를 달려온 거리가 아닌가. 40키로 즈음에는 초죽음 상태로 들어간다. 주머니에 들어있는 초코파이 하나도 짐이 되어 던져 버린다. 무념무상 득도의 경지에 오른다고나 할까. 여태 두발은 내 몸의 일부였지만 이제는 머리의 명령을 거역하고 따로 놀기 시작한다. 연도의 박수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드디어 백리를 넘어 마지막 2키로 남기고 골인 지점을 넘겨본다. 이때는 죽어가는 사람의 눈이 반짝 다시 살아나는 곳이다. 무언가 끝을 보았다는 의미일까? 마지막 몇 초라도 단축하기 위해 결승점으로 마음을 먼저 들이댄다. 다리는 달래기도 지쳐 그저 끌고 가는 귀찮은 연장쯤이다. 이윽고 목숨 걸고 그리던 목적지에 도착하였으나 경기는 파장이 되고, 결승점위에 위치한 디지털 시간만 홀로가고 있을 뿐이다. 거기에는 화려한 또 무엇도 없지만 그저 마음으로 큰 것 해 냈다는 자부심에 한해의 뜀박질을 결산한다. 아무도 도와 줄 수가 없는 길, 백오 리(42.195 Km)를 오직 자기 자신만 믿고 달려드는 배짱 운동이 마라톤이다. 때로는 웃는 내리막, 그러다 울고 넘는 오르막, 길은 또 다음 길로 이어지는 먼 길, 한차례 인생여정을 경험하듯 힘든 만큼 마라톤의 매력 또한 크다.
다섯 시간 반이 걸렸다. 길에서 이승과 저승을 넘나들던 총시간이다. 나는 뛰기 전 감사 기도를 한다, 성한 다리를 주시어 이 자리에 나와 서 있을 수 있음에 대한 감사다. 경기를 마치고는 다시 기도를 드린다. 긴긴 시간 동안 길바닥에서 두 발을 딛고 생존할 수 있었음에 대한 감사다. 사람들은 경기 종료 후 자주 기록을 물어온다. 당연하다. 경기에서 기록을 생각하지 않으면 목표가 없어진다. 자주 하는 말처럼 목표와 수치가 없는 경기는 총알 없는 총이다. 그렇지만 이런 수치들은 모두 내가 젊을 때나 지킬 분수分數이지 않겠는가. 지금 와서 기록에 매달린다한들 내세울 만한 기록이 나올 수도 없다. 그저 매번 희망사항으로 다섯 시간을 그려 놓고는 있지만 목숨은 걸지 않는다.
여러 번 뜀박질을 했지만 이번만큼 힘 든 적은 없었던 것 같다. 하루가 지난 후에야 몸살이 났다. 긴장이 풀리니 이내 목이 붓고 열이 났다. 하지만 몸은 아파도 마음은 개운하다. 그래 이 맛이야. 백리를 뛰고도 몸살 나지 않는다면 내 몸은 조물주가 재료를 잘 못 섞었겠지. 몸살이야 하루 이틀 지나면 나을 테지만 다음 걱정이 더 크다. 이번 기회로 뜀박질 그만 두겠다고 벼르고 있었으니 마땅한 대안도 없이 중대선언이 너무 앞섰나 보다. 달리지 않는다면 앞으로 무슨 맛으로 살아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