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달 (Full Moon) 2015. 4. 15. 08:55

길치 

 

석현수 

 

 

무엇에 극히 서툰 사람을 낮잡아 일러 ‘치’를 접미사로 붙인 말이 예전에는 하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음정 박자가 고르지 못해 노래에 둔한 사람을 음치라고 부르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그러나 근간에는 기계치니 길치니 하여 더러 이런 유의 단어의 수가 늘어났다. 기계치는 말 그대로 기계에 서툰 사람이다. 자동차는 휘발유만 넣으면 가는 줄 알았지 오일교환 개념도 없고 보닛 뚜껑도 한번 열어보지 못하는 문외한 들이다. 심하면 가정에서 형광등 전구하나 갈아 끼울 능력이 없는 이가 그들이다. 다행이 음치는 섣불리 나서서 멱따는 노래하지 않으면 남들에게 음치를 들키기 않으며, 기계치는 무엇이 고장 나서 드라이버라도 들기 전 까지는 그의 무능함을 숨길 수가 있다. 

 

나는 길치이다. 길치는 남에게 흉이 잡히는 것은 차치하고라도 스스로의 일상생활이 벌써 불편해 지기 때문에 피해가 크다. 다행이 요즈음은 나비게이션 장치가 있어 기기機器에 의존하여 밖을 나설 큰마음을 먹을 때가 있지만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낯선 길을 자동차로 나서기를 극히 꺼렸다. 특히 어두운 밤 시간이면 방향 감각 조차 없어지기 때문에 나는 나침반을 차 속에 가지고 다닌다. 스스로의 눈썰미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한 번 길을 잘못 들어 헤매게 되는 곳이나 도시에는 아예 발걸음을 다시 들여놓지 않기에 더욱 더 길눈을 어둡게 만들었다. 

 

신촌에 중요한 볼 일이 있었다. 시작 시간이 오전 10시 반이니 길치인 주제에 여간 긴장이 되는 것이 아니다. 지하철 2호선 신촌역 까지는 넉넉잡아 두 시간은 걸리리라 예상했다. 지하철 노선도를 보니 여러 가지 방안이 있을 것 같았고 시간도 절약할 수 있을 것 같았으나 머리를 굴려보려 해도 용기가 나지 않았다. 혹시나 길을 찾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기우 때문이었다. 가장 확실한 방법이란 미련스럽게 지하철 노선도를 펴 놓고 죽 따라가는 길 밖에 없다. 대신에 집을 좀 일찍 나서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 서현역에서 분당 선으로 올라가 종점인 선릉역에서 지하철 2호선으로 갈아 탄 뒤 그냥 그대로 죽치고 앉아 반 바퀴 돌아서 가는 방법이다. 그날 다행히 제시간에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어 걱정은 덜었으나 첫 행차치고는 우스운 와룡선생상경기臥龍先生上京記 꼴이 되었다. 

 

정말 미련하고 바보스런 접근 방법이었다. 나중에 안 일이었지만 조금만 길눈이 밝고 요령이 있었다면 지선(G) 버스로 가서 평화방송 앞에서 간선(B) 신촌 행 버스로 갈아탔더라면 한 시간 정도면 갈 수 있는 거리였단다. 아니면 수서에서 3호선으로 올라가 을지로3가에서 신촌으로 접근해도 빨리 갔을 것이라는 것이다. 아침 일찍 부산을 떨어 가족들을 힘들게 하고, 몸과 시간을 때울 속셈이었지 모험을 하거나 최악의 경우 늦거나 헤맬 각오를 하지 전혀 하지 않았다. 여성들은 종합판단 능력이나 주의 분배력이 좋아서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장점이 있는 반면, 남자들은 사냥을 통해 먹이를 해결하는 역할을 한 탓에 길눈이 밝고 방향 감각이 뛰어나서 지도를 잘 본다고 했다. 나는 남자다. 그렇다면 내게 남아있었던 남자의 속성은 모두 어디로 가고 이렇게 길치가 되어버린 것일까? 가족 구성원 다섯 중 남자라고는 나 혼자 오래 지내다 보니 일찍이 여성화로 동화가 되어서 그럴까? 지금이라도 훈련을 쌓아간다면 길치를 벗어날 수 있을까 생각해 보지만 이것만은 자신이 없다.  

 

다윈의 진화론에 용불용用不用설이 있다. 쓰지 않는 꼬리는 점점 짧아져서 노루꼬리가 되고, 오래 도록 날아 보지를 않던 타조는 영영 날지 못하는 새가 되었다. 내 경우는 혹시나 두고두고 자동차 뒤 자석에라도 앉아 호강이나 하며 다른 이에게 얹혀살라는 팔자라도 되라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