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을 만나다
스승을 만나다
석현수
어느 정도 세월이 가게 되면 축하가 새롭게 느껴진다. 목에 힘이 들어가고 얼굴에 핏기가 있을 때야 축하를 받는 것조차도 성가시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겠지만, 발걸음이 뜸해지는 나이에는 무슨 연합회에서 보내주는 빈 깡통 같은 내용의 축전 하나도 생경해진다.
한동안 엉뚱한 축하를 받아보기도 했다. 자격도 모자라는 사람이 뜬금없이 남의 ‘어버이’도 되고 ‘스승’이 되어 축하를 받아야 하는 일이 생겼었다. 그렇게 머리 큰 자식을 낳아본 적도 없고, 학교 선생님도 한 적이 없는 사람이었으나 단지 직장에서 윗사람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런 뚱딴지 같은 공경의 공세가 있었던 것이다.
‘부모 같은 분’이라거나 ‘스승 같은 분’이란 문구로 말문을 열고 존경이라는 단어로 마무리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마음을 아쉽게 하는 것은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 영특한 사람들의 마음은 변 해버린다는 것이다. 한 번 정한 부모와 스승의 관계는 세월이 간다고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때와 장소를 따라 달리할 수 있는 것이라면 이해타산이 묻어 있는 현란한 처세술에 지나지 않는다.
생일에 빠짐없이 배달되는 꽃바구니가 있었다. 처음엔 세상에 참 맹탕 같은 사람도 다 있구나 싶어 측은지심이 들었다. 남들은 없는 부모도 만들고 선생님도 만들어 가정의 달을 통째로 요리해 내는데, 한물가도 오래 전에 간 사람한테 해마다 꽃 배달이라니. 줄 설 때 줄 서고 눈 맞출 때 눈 맞추어야지 버스가 한참 지나간 뒤에 손 흔드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보낸 이의 마음을 나름대로 헤아려보았다. “특별히 당신으로부터 받았던 도움은 없었습니다. 마치도 겨울에 얇은 홑옷을 입고, 구름에 가린 햇볕조차 한 번 쬔 적은 없었지만, 아옹다옹 부대끼며 살아왔던 당신과 내가 이제는 같이 늙어가는 처지가 되었으니 그것을 슬퍼합니다.” 이 문장이 ‘축! 생일’이라고 적힌 분홍색 리본 이면에 담긴 메시지였으리라. 그러고 보니 이 사람은 바보가 아니라 초야에 묻혀 학문에 전념했던 남명 조 식 (1501-1572)에 버금갈 현자가 아니겠는가.
나도 누군가의 기쁨이 되어 주고 싶었다. 보낸 이에게 어설프게 축하 건을 만들어 설령 되돌린다 해도 오히려 그의 순수한 마음을 되레 욕되게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희가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복음 25, 31-36).
그는 내게 사람 사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아무런 이해타산도 없이, 깔아놓는 복선도 없이 불쑥 배추 잎 몇 장을 던질 수 있는 그런 장부의 마음을 가르쳐주었다. 그는 옛 직장의 부하가 아니라 같이 나이 들어가는 동료이며, 모두가 떠나가는 황량한 들판에 인정의 이삭을 주워 올려 준 나의 높은 스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