著書/기쁨거리(2011)

우리말, 내 말

온달 (Full Moon) 2015. 4. 15. 09:29

우리말, 내 말

석 현 수 

 

 

말이 통일되는 날 나라가 통일된다고 했다. 어지럽게 널려 있던 말씨들은 서로의 소통을 저해하고, 또한 지방색으로 이어져 편 가르기까지 횡횡했던 전력前歷이 있어 사투리는 환영받지 못했다. 다행히 문맹률이 세계에서 가장 낮은 문화 선진국이 되고 보니 글을 통해 말은 어렵지 않게 통일이 되었다.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이 우리의 표준어가 되어 공식석상에서 사투리 쓰는 사람이 더는 보이지 않는다. 지금의 노인 세대들이 지나고 나면 천대받던 사투리도 점점 우리의 풍속에서 사라져 오히려 사적지처럼 보전해야 할 날이 머지않았다.  

  

‘나는 나다.’라는 것을 나타내는 방법 중에 가장 속한 것이 사투리여서 자기 소개는 일부러 이것을 섞어 개성을 나타내고 싶어 한다. 특히 높은 분들의 사투리는 애교 만점이어서 군수나 도지사 얼굴이 담긴 쌀 광고나, 방문 권고 포스터에 등장하는 짧은 사투리 멘트는 오래 기억에 남는다. 표준말을 쓰라고 강조하고 닦달을 하던 때와는 격세지감이다. 말은 흙냄새를 맡으며 진화해 온 것이어서 어쩌면 먹을거리보다 더 강해 한 번 몸에 붙으면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한 지방의 말은 그 지방의 색갈이니 신토불이가 따로 없다. 표준어가 우리말이라면 사투리는 ‘나’의 말이다. 이제는 우리말 속에서 살면서 내 말도 잊지 않도록 챙겨가야 하지 않을까 싶다.  

  

수원으로 전근을 가면서 아내에게 제일 먼저 당부를 한 것이 사투리를 쓰지 말라는 것이었다. 애들이야 며칠만 섞여 놀아도 말씨가 같이 묻어가지만, 혀가 굳은 어른들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수원은 서울이 가까운 곳이라 쓰는 말씨에 따라 받는 사람 대접도 달랐다. 저녁 장을 보러 갔던 아내가 돌아와 비싼 생선을 샀다며 불편해했다.

“값도 안 물어보고 샀어?” 했더니

“보이소! 보이소! "

두 번 불러도 대꾸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 후 아내는 “보이소.”를 “여보세요.”로 바꾸었다. 가끔 마음이 급할 때만 빼고는 지금까지 성적이 좋다.

고속도로가 뚫리고 고속버스가 처음 다닐 때 말쑥이 차려입은 신사 한 분이 여승무원을 불러 말을 건넨 것이 그만 화근이 되어 검문소 앞에다 차를 세우고 승객 모두는 헌병의 검문을 받아야 했다. 당시 간첩신고의 포상금은 꽤 높았던 때여서 로또 이상으로 횡재할 호기였으니 안내양이 이런 호기를 놓칠 수 없었다. 

 

“아가씨, 용산이 한강 이남에 있쑤, 이북에 있쑤?” 

 

그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신분 확인은 마쳤지만, 상당시간 도착시간이 지연되어 다른 승객들에게 불편을 주었다고 한다. 한국 전쟁 시 북한에서 내려와 오랫동안 고향말씨를 버리지 못한 내 친구의 삼촌 이야기다. 

 

한때 연속극에는 사투리의 등장이 많았다. 주로 가사도우미들에 사투리를 쓰게 해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기도 하고 때론 개성 있는 역할을 시켜 연속극의 재미를 높였다. 그러나 정작 사투리의 주인인 그 지방 사람들은 푸대접이라며 반발이 많아 그 후로는 특정지방의 특정 역할은 피해 가기도 했다. 가사도우미는 꼭 안성댁이나 수원댁이 되어야 하는가? 왜 허접한 곳에는 전라도 사투리가 들려야 하는가? 폭력배 역할에는 꼭 부산 사투리가 사용되어야 하는가? 등이다.  

  

시절이 많이 달라졌다. 사투리는 나라의 발전을 저해하는 흉물스런 쓰레기가 아니라, 두고두고 기록에 남겨두고 연구해 두어야 할 사투리 문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사투리가 점점 지방의 토산물처럼 트렌드화 되어간다. 그 지방 순정품 출신이 되려면 적어도 자기가 속한 지방의 사투리 몇 정도는 알아들어야 인정을 받는다. ‘감수광’을 모르면서 제주도 출신으로 자부심을 느낄 수 없고, ‘보이소’를 모르면서 대구 사랑을 이야기할 수 없고, ‘그래 유, 저래 유’를 모르면서 충청도식 살가운 인사를 나눌 수 없다. ‘뭣 땀시 고로콤 그런다~잉’으로 심각한 분위기도 웃음바다로 넘어가는 것이 전라도 사투리의 묘미다. 사투리는 먹을거리에 이은 또 다른 신토불이身土不二가 되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