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하장을 쓰면서
연하장을 쓰면서
석현수
시대가 변하니 세시풍속도 빨라지는 것 같다.
11월 중순이면 벌써 크리스마스 캐럴이 흘러나오고, 마지막 한 장 남은 12월 달력은 아예 다음 해 것으로 갈아치운다. 세월이 빨리 가는 것인지 마음이 급해지는 것인지 모르겠다. 격랑激浪의 한 해를 지내다 보니 모진 세파가 지겹기도 하여 마지막 달이 얼른 지나갔으면 하는 성급함이 어찌 없겠는가. 오래된 신발을 얼른 설빔의 새것으로 갈아 신고 싶은 어린이의 마음이나 한 해의 끝자락에 서서 빨리 마무리를 하고 싶은 어른의 마음이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연하장을 사고 보니 너무 많이 산 것 같다.
지난해도 그랬는데 올해 또 마찬가지다. 보낼 곳과 받을 곳을 빤히 알면서도 덥석덥석 주워 담았던 것은 들뜬 기분에 저질러진 일이었다. 항해를 마친 배가 항구에 닻을 내리듯 나는 이제 조용히 살아야 할 사람이 아니던가. 한때 200~300장씩 보냈던 적도 있었지만, 그건 명함이라도 지니고 다닐 때여서 인적 네트워크가 왕성하게 작동하고 사람 관계가 촘촘하게 엮였을 때다. 연하장이 무슨 인기의 척도이며 지체의 높낮이를 판단하는 기준이라도 되기라도 하는 듯 공중에서 전단 뿌리듯 보내주고 또한 받았던 시절이 있었다. 마치 윤활유를 치듯,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듬뿍듬뿍 기름칠 해댄 것이다. 12월은 이런 허드렛일 하다가 하루해가 저물고, 주말이면 가족까지 동원해 늦게까지 불을 밝히기도 했다.
연하장이나 성탄카드는 받는 사람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보내는 사람이 보기 좋다고 생각하는 카드를 사서, 보내고 싶은 사람에게 보내는 것은 반쯤의 성공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받는 이가 기쁘고 반가워야 한다. 서로의 미적 감각과 취향이 같다면 금상첨화이겠지만 어지간히 가까운 사이가 아니면 상대의 기호嗜好를 알아내기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문장 한 줄이라도 공을 들이고 겉봉의 주소 한 자라도 또박또박 써서 이편의 성의를 실어 보내는 수밖에 없다. 더욱이 면식이 어지간하지 않으면 보내지 않는 쪽이 좋다. 보내는 번거로움이 많아서가 아니라 받는 이에게 회신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다. 연하장을 받아 쥐고 짜증스런 때가 누구나 한두 번 있었을 것이다. 답장 하자니 먼저 보내지 못한 지각 인사가 쑥스럽고 답장해 주지 않으려니 결례가 될 것 같아 상대방을 안절부절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수천수만의 헬 수 없을 연하장을 받았다던 영국의 대처Margaret Thatcher 총리도 나이가 드니 고작 다섯 손가락 내의 편지만을 받았다고 한다. 손자들이 보낸 몇을 빼고 나면 겨우 한두 명이 고작이었겠지. 이것이 천하를 호령하던 여걸이 가진 권력의 무상이런가? 나이가 안겨주는 고독이란 선물이랄까? 누구든 세월 가면 잊히기 마련이니 연하장 숫자가 주는 체감온도는 영하로 뚝 떨어지게 되어 있다. 이젠 나도 적게 보내고 적게 받을 처지다. 아직도 50장이나 되는 연하장을 손에 잡고 보낼 곳을 이리저리 꿰맞추고 있으니 영국 총리보다는 숨 쉴 만하다는 생각에 적은 위로를 가져본다. “신臣에게는 아직도 12척의 배가 있습니다.”라고.
해마다 필요 이상의 숫자로 우수리를 두는 것은 주제를 못 파악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비록 오고 갈 곳이 많지 않을 것임을 스스로 알고는 있지만, 혹시 생각 밖의 지각 인사라도 보내오는 사람이 있으면 답장은 제때에 해 주고 싶은 이유에서다. 차라리 몇 장을 묵히더라도 카드를 못 사 회신을 못 하는 곳이 하나도 없도록 하자는 생각에서다. 어느 해는 1월 중순에까지 지각하는 이들도 있었다. 이럴 때는 여분의 비축 연하장이 주효奏效하다. 구정 때 연하 인사를 보내는 것이다. 어차피 새해는 같은 새해일 테니까.
많을 때는 숫자로서 기쁘겠지만 적을 때는 적힌 내용을 읽으며 위안 삼는다. 하룻밤에 백 장도 넘게 갈겨쓰던 필치가 녹이라도 슬었는지 몇 장 되지 않는 것에 하루해가 저물고 있다. 지금은 쓰는 즐거움, 받는 기쁨을 생각하며 연하장에 공을 들인다.
직장동료가 옛날 옛적 같이 찍은 사진을 연하장 속에 동봉해 보내왔다. 테니스라켓을 쥐고 선 짧은 바지 밖으로 사내들의 아랫도리가 탱탱하다. 삼십 년도 더 지난 오래된 사진이다. 사진 속에 웃음이 만연한 친구에게 각근한 안부를 전한다. 그대, 내년에도 꼭 안녕해 줄 것인지를 물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