著書/美世麗尼(2018)

신분 세탁기가 된 아파트

온달 (Full Moon) 2018. 2. 21. 10:08







신분 세탁기가 된 아파트

 

이웃이란 없어진 단어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유행가 속 충청도 아줌마가 되어버렸다. 이웃은 ‘와도 그만 가도 그만’이다. 적어도 아파트 단지에서만큼은 그렇다. 알리려 하는 이도 없고 굳이 알려고도 하지도 않는다. 새사람 왔으니 앞으로 잘 부탁한다며 떡 돌리는 일은 고전 풍속도에서나 찾아볼 일, 길 떠나는 옆집 사람에게 서운하다며 아침밥 차려놓고 눈물 글썽이며 토닥여주던 이별은 문학작품 소재로도 더는 등장하지 않는다. 아파트는 점점 공룡 화 되어가고 특히나 봄가을이면 낯선 이의 천국이 된다.

 

아파트에서는 누구나 어느 집, 누구 엄마가 아닌 ‘몇 호 집’ 사람으로 살아간다. 남자도 여자도 어른도 아이도 하나로 묶어 ‘몇 호 집’으로 통한다. 미용에서나 볼 수 있는 유니섹스 시대가 왔다. 이런 판국에 눈치를 줄 용기 있는 위인도 없고 조심할 졸장부도 없다. 서로를 모르고 산다는 편리성 하나로 아파트는 신분 세탁기 역할을 충분히 해 낸다. 때 묻은 인간의 때를 쏙 뺄 수 있는 마력을 가진 세탁기. 다름 아닌 아파트 단지다. 쉽게 숨어들 수 있는 곳, 빨래를 마치면 얼른 꼬리를 자르고 달아 날 수 있는 곳이다. 검은돈만 세탁하는 줄 알았는데, 인간마저 이렇게 세탁될 줄이야.

 

분당에 살던 때의 일이다. 어느 날 갑자기 경비아저씨가 ‘몇 호 집’ 사람이 이사 간다는 귀띔을 해 주었다. 어지간히 골치를 썩이던 입주자이었던지라 경비원의 얼굴이 다소 상기된 모습이었다. ‘몇 호 집’은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아저씨가 동남풍 불어 나가면 아주머니는 서북풍이 불어 나갔다. 맞바람이 드세었다. 본인들만 모를 뿐 동네에서 대충 감을 잡고 있었지만 모두 말을 섞기 싫어서 그냥 모른 체 입을 다물었을 뿐이다. 설상가상으로 하나 키운 과년한 딸마저 연애 열풍이 불어 회오리바람에 휩싸였다. 아파트 입구까지 바래다주는 청년의 모습은 때때로 얼굴 모양새가 달랐다.

 

부부싸움이 있는 날이면 관리소에서 층간소음을 강조하는 방송이 나왔고 그래도 싸움이 그치지 않으면 모두 말 못 할 경비원에게 역정을 냈다. 이런 참에 이사 소식을 들으니 경비 아저씨인들 어찌 기쁘지 아니했겠는가. 나의 벽은 옆 집사람의 벽이요 내가 걷는 마루청 바닥은 아래 사람의 천정이라는 방송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몇 호 집’ 난리 통 때문에 귀에 익은 주의사항이었기 때문이다. 승강기에서 서로 눈길이 마주쳐도 기세가 너무 등등했기에 대놓고 불편해하는 이는 한 사람도 없었다. 가을이 다 가기 전 딸자식이 한 살이라도 덜 먹어서 혼사를 벌일 모양이었다. ‘신분 세탁기’ 의 힘을 빌릴 때라는 것을 용케 알았나 보다. 타이밍이 절묘했었다.

 

아파트 살림이란 아침에는 동쪽에서 내려 싣고 저녁에는 서쪽에서 정리를 마치면 이사 끝이다. 살던 곳에서도 그 사람이 이사 간 줄 모르고, 새로 옮긴 곳에서도 누가 온 줄 모른다. 세탁기가 잘 돌아간 증거다. 여기다 방향제 몇 방울을 타면 향긋한 향내까지 나는 세탁이 이루어진다. 몇 년을 두고 벌이던 부부의 힘겨루기도 잠시 멈추고 잉꼬부부로 모양을 갖추었을 것이다. 설령 딸의 혼사 파트너가 바뀌었다 해도 아무도 모를 것이다. 이전Before과 이후After를 비교할 재간이 없으니. 완벽한 연출로 요조숙녀가 되어 내숭만 잘 떨면 그만이다. 그들에게는 이웃이 없다는 아파트 생활이 얼마나 다행이라 생각되었을까.

 

<나는 네가 지난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I Know …. ‘ (감독 짐 길레스피)'>는 영화 제목에서나 가능한 일. 집 밖을 나서면 갓 태어나 막 출생신고를 마친 신생아처럼 가족 구성원 모두가 뽀송뽀송 야들야들해질 것이다. 아무리 찌들어버린 과거라는 땟자국도 한 바퀴만 돌아가면 빨래 끝이다. 금상첨화로 외제 차 하나 쑥 뽑아 타고 다닌다면 또 다른 이름의 ‘몇 호 집’ 사장님, 사모님, 따님 소리 들을 것이다. 운동에서만 패자 부활전이 있는 것 아니지 않은가. ‘안에서 새던 바가지 밖에선들 새지 않으리’란 말이 있긴 하지만. 그땐 용한 세탁기 찾아 또 다른 곳으로 떠나면 되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