著書/人情事情(2019)

일제강점기의 국민문학을 말하다

온달 (Full Moon) 2018. 11. 2. 04:00

일제강점기의 국민문학을 말하다

 

 

일제강점기에 쓰인 ‘국민’이라는 단어는 ‘황국신민皇國臣民’의 준말

이었다는 것을 아는 이가 그리 많지 않다. 식민시대의 ‘국민학교’가

광복 이후에도 사뭇 오래 쓰이다가 후일 ‘초등학교’로 명칭을 바꾸

는 수고가 있어야 했다. 일제강점기의 ‘국민’은 ‘황국신민皇國臣’으

로서의 국민이다. 황국신민은 천황이 다스리는 나라의 신하된 백성

이라는 뜻이다. 삼강오륜三綱五倫에는 신하는 임금에게 충성을 다하

는 군위신강君爲臣綱 즉 임금과 신하의 도리가 있다. 이는 일본 천황

에 대한 충성의 도리이다. 이러한 설정은 주권재민主權在民의 민주주

의 제도에서는 절대 허용될 수 없는 일이다. 그동안 귀에 익었던

‘국민학교’를 어느 날 갑자기 ‘초등학교’로 바꿔 불러야 했던 속사정

이었다.


국민문학의 개념은 절대한 의미에서의 그것과 상대적 의미에서

의 국민문학이라는 두 방면에서 추구할 수 있다.1) 절대한 의미에서

의 국민문학을 말할 때 이는 국민정신에 입각한, 국민 생활을 선양

하는 문학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볼 때 국민문학이란 세 149

계에 오직 하나가 있을 뿐이다. 다음 상대적 의미에서의 국민문학의

개념은 세계에 있는 국가의 수효만큼 국민문학을 가지게 된다. 일본

정신을 표현한 것은 일본의 국민문학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즉 상

대적인 입장에서 일본의 국민문학의 개념을 추구할 때 그것은 넓은

의미와 좁은 의미 두 가지를 논할 수 있다.


 넓은 의미에서의 일본의 국민문학은 즉 고유한 의미에서 그것인

바, 이는 시대와 유파에 관계없이, 일본 정신에 입각한, 일본 국민

생활을 선양하는 모든 문학을 말하게 된다. 따라서 만요슈나 하이쿠

같은 것을 훌륭한 국민문학이라 한다.


 좁은 의미에서 일본의 국민문학은 시대적 요구에 의하여 시대적

명제로서 지나사변 등으로 싹트기 시작했고, 태평양전쟁 당시 가장

열의 있게 부르짖었던 문학운동으로서의 그것에 한정할 뿐이다. 이

에 조선은 조선문인협회의 결성으로 그 주류적인 성격을 획득했으

며, 해방과 동시에 소멸해버렸다.


 일반문학과 국민문학의 다른 점은 국민문학은 국민 생활을 선양

하는 것이기 때문에 계몽선전문학이며 그 입장은 예술성을  방기

한 공리의 문학이요 또한 형식보다 내용에 더 치중하는 문학이었

다. 이러한 입장에서 국민문학의 요건을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 국민문학은 ‘일본 정신’을 근간으로 한다.

○ 국민문학은 ‘일본 정신’에 입각한다.

○ 국민문학은 일본 ‘국민 생활’을 취급하는 것이라야 한다.

○ 국민문학은 국민 생활을 ‘선양하는 문학’이어야 한나.

○ 국민문학은 ‘모국어[日本語]’로 써야 한다. 150


 점령국 일본은 조선에 대해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정책을 펼쳤다.

일본인[內地人]과 조선인朝鮮人을 하나로 묶었다. 내선일체內鮮一體인 나

라의 백성, 즉 황국신민皇國臣民(황국, 신민神民의 백성)을 만들겠다

는정책을폈다. 이에따라조선인들은창씨개명을강요받고, 조선인

의 말은 조선말이 아니라 일본말이 국어가 된 것이다. 이런 점을 염

두에 둔다면 국민문학의 창간 목적은 황국신민 의식의 앙양이며,

황국신민 사기의 진흥이며, 내선일체의 문화 종합이며, 황국신민 문

학의 건설이다. 1941년 10월 국민문학 창간 즈음에 나타나는 ‘우리

말, 우리글’의 ‘우리’는 황국신민의 말(일본)이며, 국민은 오늘날의 국

민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쓰였던 것이다.


내지인內地人:일본에 거주하는 일본인

내선일체內鮮一體:內地人과 朝鮮人이 한몸이 됨2)


 한국 근대문학사에 등장하는 ‘국민’을 지금의 국민으로 이해하면

본의 아니게 역사 왜곡을 하게 된다. 황국신민의 ‘국민’ 속에는 국토

찬탈과 문화 찬탈의 무서운 독소가 포장되어 있었다. 국토 찬탈의

경우는 한국 근대사를 통해 많이 다루어졌으나, 후자의 문화 찬탈은

미흡하게 다룬 점이 없지 않아 강점기의 문장을 읽을 때면 이러한

혼동이 있었다.


 잡지 국민문학이 어떻게 출발했는지를 알아보자. 1941년 5월, 

문장과 인문평론에 이어 20여 종의 잡지가 일제에 의해 강제 폐

간된다. 이와 같은 폐간 조치는 침략 전쟁에 혈안이 된 일제가 전시

체제에 맞추어 인력과 자원을 집중하는 과정에서 나온다. 종이 난을

해결하고 조선의 언론과 잡지 매체를 총독부 체제에 복속시켜 문인 151


들을 어용화 하려면 먼저 잡지의 통폐합이 필요하다고 계산한 것이

다. 같은 해 10월, ‘인문사’에서 통폐합에 의한 어용 잡지인 국민문

학이 나온다.


국민문학의 발행과 편집은 문학 이론에 능통하면서 일제의 정

책에 적극적으로 협조하던 최재서가 맡는다. 최재서는 1930년대에

경성제대 영문과를 거쳐 런던대학교 유학을 다녀온 사람으로, 당시

로써는 드물게 서양 문학 이론을 현지에서 습득한 지식인이다. 이런

그가 열렬한 일왕 숭배론자로 변신해 일제를 등에 업은 채 “국제 관

념의 명징, 국민 의식의 앙양, 국민 사기의 진흥, 국책에의 협력, 지

도적 문화 이론의 수립, 내선 문화의 종합, 국민 문학의 건설” 등을

내건 국민문학의 주간직을 맡은 것이다.


 국민문학의 설립목적을 지금 우리말로 다시 풀어쓰면 다음과 같

은 것이다. “국제관념 즉 대동아 공영권 수립에 대한 명징성, 이를

위한 황국신민으로서의 국민의식 앙양, 황국신민으로서의 자부심

및 사기 진흥, 일본국 국책에 대한 절대적 협력, 동아세아 신질서의

건설이란 국제여론과 국민 총력전을 대비한 대미전對米戰에 대한 준

비, 일본과 조선이 내선일체가 되어야 하는 필연적인 당위성, 조선

사람은 황국신민이요 일본인이라는 전제로신민으로서의 위상을 높

이는 일, 내선일체 신민의 사기를 고취하기, 조선과 일본은 한 나라

가 된 마당에 새로운 문화 창달. 황국신민으로서의 새로운 문학의

건설” 등이다.


 최재서가 주재한 일제의 어용 잡지라는 점에서 국민문학은 인

문평론의 연장선 위에 놓인다. 국판 200쪽 안팎. 집필진으로 일본

인 9명과 조선인 12명이 참가했다. 처음에는 연 4회 일어판, 연 8회

국문판을 펴내려고 했으나, 일제의 국어 말살 정책으로 1942년 5․6 152


월 합병 호부터 한국어를 빼고 일어판을 냈다. 이후 해방이 되기까

지 ‘국민문학’이라는 말은 일제의 국책國策을 수행하기 위한 이념으

로 선전된다.


국민문학 창간호에는 최재서의 「국민문학의 요건」과 박영희의

「임전 체제하의 문학」이라는 논설을 비롯해 이효석․정인택․이석

훈 등의 소설과 주요한․임학수․김용제 등의 시가 실린다. 필자의

3분의 2가 조선의 중견 작가임에도 국민문학에서 사용하는 언어

는 일본어이다. 이 잡지는 특집으로 신인들의 창작 작품란을 마련하

고 시론이나 연극론 같은 문학 비평을 싣기도 한다.


 1944년에 접어들며 태평양전쟁이 고비로 치닫자 문예물은 거의

자취를 감추고 시국에 대한각성을논하는글들이지면을채우게 된

다. 문예지로서의 성격은 없어지고 친일 문학만 남아 독초처럼번성

하는 문학의 암흑기가 되어버린다.


 강압적인 부분도 있었겠지만, 당대에 배우고 글이나 읽었다는 문

인들이 앞장선 부분이 많았다. 문인들은 황국신민으로 받아준 일본

천황에 감사하는 글들을 썼다. 일본과 조선이 한 나라가 되었으니

조선인도 황국신민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 국어도 당연히 일본말이

되어야 한다며 이름 석 자도 황국신민답게 바꾸는 것을 자랑삼았다.

 일제는 1930년 후반에 군국주의를 다그치고 1940년대에는 민족말

살정책을 쓰면서, 작가들에게 친일을 유도하고 강요했다. 그때까지

활동하던 작가들 상당수가 일제를 옹호하고 침략전쟁을 찬양하는

언동을 하고 작품을 썼다. 일본어로 창작하면서, 일본인이 된 것이

자랑스럽다고 하기도 했다.3) 이렇게 된 이유를 일제의 강요 때문이

라 하고 말 수는 없다. 민족 허무주의에 사로잡혀있던 작가들은 쉽

사리 노선을 바꾸고 적극적으로 친일을 했다. 친일문학이란 주체적 153


조건을 상실한 맹목적 사대주의적인 일본 예찬과 추종을 내용으로

하는 문학이다. 아래의 인용은 당시 매일신보의 논설내용이다.


「심적 신체제와 조선 문화의 진로」

“나는 지금에 와서는 이러한 신념을 가진다. 즉 조선인은 전연 조선

인인 것을 잊어야 한다고. 아주 피와 살과 뼈가 일본인이 되어 버려야

한다고. 이 속에 진정으로 조선인의 영생永生의 유일로惟一路가 있다고.

그러므로 조선의 문인 내지 문화인의 심적 신체제의 목적은 첫째로 자

기를 일본화하고, 둘째로는 조선인 전부를 일본화하는 일에 전심력

心力을 바치고, 셋째로는 일본의 문화를 앙양하고 세계에 떨치는 문화

전선의 병사가 됨에 있다. 조선 문화의 장래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

러하기 위하여서 조선인은 그 민족 감정과 전통의 발전적 해소를 단행

할 것이다. 이 발전적 해소를 가리켜서 내선일체라고 하는 것을 믿는

다.”4) -매일신보, 1940년 9월 기사


 근대문학의발자취를 따라가 보면 이러하다. 독립신문(1919), 조선

문예회(1937.4), 시국대응 전선사상보국연맹(1938.6.20), 황군위문작가

단(1939.3.4), 조선문인협회(1939.10), 국민문학(1940.9), 국민문학(1942)

5, 6호 국어잡지로 전환(여기에서 국어는 황국신민 자격으로서의 일

본어를 뜻하고 국민은 황국신민을 줄여 국민으로 하였다), 마지막

단계에서 우리말 말살의 단계에 이르고 있다.

일제의 광분적인 전시 정책에는 당시 거의 모든 문학인이 협력했

던 것으로 나타나 있다. 물론 이 중에는 마지못한 연명책에서 나온

동조자도 있을 수 있다. 지도급 위치의 저명 문화인들이 다투어 펼

친 경거망동은 생각만 해도 낯뜨겁기 짝이 없다. 글 쓰는 사람, 문인

들은 무지렁이가 아닌 당 시대의 지식인들이기에 그들의 일탈이 더 154


욱 우리에게 허망하다. 민족애를 말하고 이상주의를 설교하던 작가

들이 일본이란 새로운 조국을 위해 싸우자며 이를 ‘신시대의 윤리’

니 ‘전선기행戰線紀行’이니 하는 따위로 자기 앞가림에 광분했다. 선량

한 백성들은 누굴 믿으며, 누굴 보고, 무엇을 배울 수 있었을까. 총

칼로짓누르는점령국군대보다문화 찬탈의 기수가된 조선의 문학

인들, 펜이 칼보다 더 무섭다는 말을 실감케 하였다. 가롯유다의 모

습을 보는 듯하지 않은가

 문학자의 모럴은 사회에 대한 책임과 결부된다. “문학은 삶의 하

나의 방식이지, 삶의 수단이아니다.”5) 값싼 숙명의식속에서타락해

간 지식인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는 아직도 풀어야 할 숙제이다. 최

소한 작품의 문학적 가치는 인정해주어야 한다는 동정론도있다. 그

러나친일 명단에나타난많은 문인의친일행각을보노라면이러한

동정의 여지가 없어진다. 국민문학은 민족의 혼을 팔아넘긴 황국신

민의 환영幻影이어서 해방과 더불어 저절로 소멸해버렸지만 지워지

지 않는 얼룩으로 우리에게 남아있다. 얼룩이라는 표현보다는 상흔

傷痕이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1) 임종국, 친일 문학론(2013), 민족문제연구소, pp.498~500

2) 임종국, 위의 책, p.7

3) 조동일, 한국문학통사 5권(2007), 지식산업사, p.35

4) 임종국 앞의 책, p.322

5) 임종국 앞의 책, p.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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