著書/人情事情(2019)

고품격 글쓰기를 위하여

온달 (Full Moon) 2018. 11. 2. 08:04

고품격 글쓰기를 위하여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것이 있다. 바탕이 제대로 안 된 상태에서

좋은 글 기대하기다. 문제는 곧 인문학적 소양이다. 씨를 뿌려 좋은

열매를 맺게 하려면 종자도 토양도 좋아야 한다. 문학도에게는 인문

학적 바탕을 두고 말한다. 아무리 해도 안 되는 일은 남자를 여자로

여자를 남자로 만드는 일로 알았지만, 요즈음은 성전환 수술이있어

그것마저 가능한 일이 되어버렸다. 이것 말고 세상에 안 되는 일이

하나 더 남았다. 전혀 준비 안 된 작가의 좋은 글쓰기다. 호박에 줄

을 긋는다고 수박이 되겠나. 함량 미달 작가의 고품격 글쓰기가 그

러하다.


 인문학적 바탕이 없으니 고품격 글쓰기가 될 수 없다. 이런 글쓰

기로는 수박의 단맛을 담아낼 수 없다. 글의 외연을 넓혀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인문학적 바탕이 되어야 글다운 글이 될 것

이라며 자성의 목소리가 크다. 지금은 읽는 쪽 쓰는 쪽 모두가 인문

학적 소양이 없으니 서로가 불편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도 없을 테니까.                                                      121


 요즈음 글들을 보면 사적이고 정적인 글들이 대부분이다. 문예지

마다 실리는 글들이 그 글이 그 글이다. 아쉽게도 이들의 독자란 대

게가 익명의 다수가 아닌 가까이 있는 소수의 동료다.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니 글 평도 후하다. 속내는 내 글이나 네 글이나 거기가 거

기다 싶어 무관심 속에 칭찬 일변도의 말잔치만 벌일 뿐이다. 아무

런 자극이 없으니 발전 또한없어 제자리걸음이다. 서점으로 출고되

어 다양한 독자들을 만나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다. 그나마 가까운

도반道伴들마저도 그저 그러려니 하면서 보내주는 작품집을 완독해

주는 상호부조도 없다. 이런분위기에 건전한비평이나 절차탁마切磋

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사서 보는 읽을거리가 아니라 공으로

보내오는 책이기에, 상대의 서재에 꽂히기보다는 잠시 머무르다 떠

나야 하는 서글픈 과객過客 같은존재가 문인들의 글이다. 이것이 자

비출판의 한계요, 현실이다.


 고품격이란말을 철학적이란말과 혼용하는 경향이 있다. 이를못

따라가면 어려운 글쓰기를 하고 비몽사몽간에 뜻 모를 이야기만 하

게 된다. 이 지경에 이르면 고품격은 물 건너간다. 차라리 그렇고 그

런 글이 편하게 읽힌다.


 가끔 만났던 고품격 작품 중에는 잡박雜駁하여 읽고 나서도 남는

게 없는 것도 더러 있긴 하다. 이럴 때는 이해력이 부족해 소화불량

에 걸렸을지는 모른다는 자기반성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 철학이란

누구한테나 선뜻 문을 열어주는 만만하고 손쉬운 학문이 아니지 않

은가. 바탕이 제대로 되지 않은 사람을 기준으로 작품을 쓰는 사람

은 없을 테니까. 독자의 수준이 작가의 수준에 못 미치는 경우가 허

다하기 때문이다. 다른 이의 작품을 통해 자기진단과 반성을 할 수

있는 정도라면 이런 독자는 고품격 글쓰기에 상당히 가까워져 있다         122


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고품격 글쓰기를 위한 전제 조건이 철학적이어야 한다면 철학적

인 글을 쓰기 위해서는 먼저 철학philosophia이 무엇인지부터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영어의 철학이라는 용어는 원래 그리스어로 필로소피

philosophia를 뜻한다. 필로소피아는 필로스philos, 사랑함와 소피아sophia,

지혜라는 두 말을 합성한 것이다. 필로소피아라는 말을 그대로 번역

하면, ‘지혜에 대한 사랑’ 또는 ‘애지愛智’를 뜻한다. 철학은 ‘이론적

지식’뿐만 아니라 ‘선악의 인식’을 내용으로 삼으며, 비판적 자기 검

토를 통해 올바른 실천적 행위를 목표로 하는 ‘실천적인 지식’을 말

하기에 결국 ‘지행합일知行合一’이 되어야 한다. 철학적인 글쓰기는 철

학적 삶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글 쓰는이가 고품격의 사유思惟로 살

아가지 못하면서 고품격 글을 기대하는 것은 나무에서 물고기를 구

하는 일일 것이다.


 작가가 철학적 삶을 통해 고뇌에 찬 작품을 내놓을 수 있을 때까

지, 독자가 철학적 글을 소화할 수 있는 역량이 있을 때까지 우리는

서로 해야 할 일들이 있다. 서양과 동양의 글쓰기 모습은 아주 다르

다. 이 다름을 알기 위해서는 쓰기 어려워도 철학적 글을 써야 하고

읽기 어려워도 고품격 글을 읽어야 한다. 동서양 문화의 차이를 극

복해야 한다. 혹자는 이 차이를 통합적 사고에 익숙하면서도 분석적

사고에 취약한 아시아 지성인의 흠결로 보는 이도 있다. 특별히 우

리만 그렇다는 이야기가 아닌 아시아적인 공통점이라니 조금은 위

안이 된다.


 우리의현주소는 인문학이 대세라고말하고 있다. 말은 그렇게 하

면서도 자구 노력은 하지 않고 타성에 젖은 글쓰기를 하고 있다. 감

각과 정서에만 의존하는 글쓰기를 탈피해나가야 한다. 자기중심의     123


자화자찬에서 벗어나 보자. 칭찬 일변도의 주위의 글평에 안주하지

말자. 이는 영양가 없는 빈 숟가락을 글쓴이 입에 물려주는 행위다.

난해한 글이 철학적인 글이 될 수는 없다. 유명 철학자의 경구나 채

근담菜根譚을 많이 인용한다고 해서 글이 철학적으로 되지 않는다.


 고품격의 글은철학자를흉내 내는것이아니라글쓴이의 철학적 삶

이 보여야 하며, 그것이 글로 묻어 나와야 한다. 인문학적소양을 기

르는 일은 가장 중요하다. 수박이 먹고 싶다면서 호박에 줄 긋고 먹

는 성급함이 없어야 한다. 철학적인 삶을 통한 고뇌의 흔적을 보여

줄 수있을때까지모두는많이 듣고 많이읽어야할 것이다. 구양수

歐陽脩의 3다 중 많이 쓰기[多作]는 그 뒤의 일일 것이다.             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