著書/人情事情(2019)

빗속에서의 팡세

온달 (Full Moon) 2018. 11. 2. 09:09

빗속에서의 팡세



 태풍 쁘라삐룬이 올라오고 있다. PRAPIROON은 태국에서 제출한

이름으로 ‘비의 신’이란 뜻이란다. 비의 신이 이곳까지 도착하려면

이틀이 더 남았지만 벌써 태풍의 영향권에 들어 연일 물 폭탄을 맞

고 있다. 근래몇해 동안가뭄에 시달려상수도물까지위협받던터

라 빗줄기가 아직은 밉지 않다.


 밥숟가락 내려놓자마자 곧바로 공원으로 향한다. 아무리 비가 와

도 산책해야 할 이유가 따로 있다. 복잡한 머릿속을 비로 식히고 싶

어서다. 비옷 위에 우산을 쓰고 어깨에는 라디오를 메고 있다. 음악

소리가 어울리지 않는다. 하필이면 이런 날 헨델의 오라토리오 ‘메

시아’일까? 귓전에는 오직 우산을 때리는 비, 빗소리뿐이다. 넓은 방

패를들고 진격하는로마병사처럼 장대비를 밀치며간신히길을 내

고 있다. 서서히무섭다는 생각이들었다. 평소 많은인파로붐비던 곳이련

만 호우경보 중이니 텅 빈 공원길은 한 사람의 로댕만 사색에 잠겨

있다. 무섭다는 생각보다는 불현듯 외로움이 엄습해 온다. 남들이           93


보면 무슨 청승인가 싶겠지. 혼이 빠진 사람인 양 시선을 떨구고 발

걸음을 재고 있다. 나를 적시며 때리던 빗물은 어느새 개울을 이루

며 흘러내린다. 빗물도 제 갈 길이 무척 바쁜가 보다.


 이 빗물은 내일쯤 강으로 흘러들겠지. 우리는 낙동강이라 부르겠

지. 강은 바다로 연결되고 부산 사하구 어디쯤에서 남해와 합류할

때가 오겠지. 그러면 끝없이 펼쳐진 대양으로 이름을 바꾸어 바다의

위용을 한껏 부리겠지. 세월호를 삼키고 우리를 울렸던 바다. 파도

가 잔잔해질 때면 작열하는 태양열로 바닷물은 수증기로 변모하여

하늘로 날아오르겠지. 우리는 그것을 구름이라 부르겠지. 구름이 모

여 비를 만들고 비는 다시 순환을 계속하겠지.


 순환이란 끝이 나지 않는 것이다. 여기가 끝인가 했더니 저기에

있고 저긴가 했을 때는 하늘을 쳐다보아야 한다. 물은 돌고 도는 순

환의 고리 속에 형태만 달리 취할 뿐이다. 인간도 대자연 속의 일부

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 또한 자연의 예외조항이 될 수 없다. 자연으

로 돌아가야 한다. 인간에게도 무위자연이 자연의 이치다.


 ‘무위자연無爲自然’은 억지가 없는 순리에 따르는 삶을 의미한다.

도가에서는 무위자연을 도덕의 기준으로 삼는다. 노자老子와 장자

가 대표적인 인물이다. <장자莊子 외편外篇 지락至樂>에 “항아리를

두드리며 노래를 부른다.”는 장자고분莊子鼓盆1) 이야기가 있다. 장자

는 죽음까지도 자연의 변화에 불과하다며 아내가 죽었을 때 항아리

를 두드리며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장자에게 죽음이란 봄․여름․

가을․겨울이 되어서 사계절이 운행되는 것과 같다고 했다. 도인의

기행이라고 해야 할까? 장자의 자초지종 설명이 얄밉기까지 하다.

인위적이 아닌 것이 무위자연이라면, 사람도 자연 일부라면서 왜

인간만 생각이 있어 흔들리는 갈대로 살아야 할까? 며칠간 머리가       94


지끈거렸다. 딸자식 뒷바라지 때문이다. 딸아이란 출가외인出嫁外人

이라며 시집만 보내면 그만일 때는 옛날이다. 아들자식은 살림내놓

으면 그만이지만 딸자식은 A/S 기간이 무한대다. ‘딸바보 아버지’는

이런저런 소리를 다 들어야 한다. 결혼 10년 차도 넘었지만, 숙제는

아직 덜 풀렸다. 이럴 때는 전과全科 책이나 예상문제집이라도 있으

면 해법을 찾아보고 싶어진다. 장대비를 두들겨 맞고도 길에 서 있

을 수 있는 것은 잠시라도 머리를 식히고 싶어서다. 비가 땅의 열기

를 빼앗아 가듯 내 생각의 열기도 냉각수가 필요하다. 비를 맞으며

빗소리를 들으며 순환의 고리를 생각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인위를

떨쳐가며 자연 속에 숨을 쉴 수 있었다.


 쁘라삐룬태풍이 위용을 떨칠 모레쯤이면나는몸살을 앓고 있을

것이다. 아이야 걱정하지 마라. 부모는 사서 하는 고생이라도 주저

하지 않겠다. 사람의 힘이 미치지 않으면 저절로 풀리는 일은 아무

것도 없다. 무위를 꿈꾸면서도 작위를 포기 못 하는 아버지는 끝내

뜨거운열기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래도 좋다. 언젠가 도인

의 아내처럼 자연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때는 아버지도 장자가

되어 북 치며 노래하고 있을 것이다.


1) 최봉원 역주 중국 선진우언(2016) 명문당, p.397                   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