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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 / 이규보

온달 (Full Moon) 2019. 7. 25. 09:41


  

남행월일기(南行月日記)

 

 

 내가 일찍이 사방을 두루 다녀 무릇 나의 말발굽이 닿는 곳에 만일 이문(異聞)이나 이견(異見)이 있으면, 곧 시(詩)로써 거두고 문(文)으로써 채집하여 후일에 볼 것을 만들고자 하였으니, 그 뜻은 무엇인가?

 

 가령 내가 늙어서 다리에 힘이 없고 허리가 굽어서 거처하는 곳이 방안에 불과하고, 보는 것이 자리 사이에 불과하게 될 때, 내가 손수 모은 것을 가져다가 옛날 젊은날에 분주히 뛰어다니며 유상(遊賞)하던 자취를 보면, 지난 일이 또렷이 바로 어젯일 같아서 족히 울적한 회포를 풀 수가 있겠기 때문이다.

 

 나의 시집 가운데 강남시(江南詩) 약간 수(首)가 있는데, 이제 와서 그 시들을 읽으면, 당시 노닐던 일이 역력히 마치 눈앞에 있는 듯하다.

 

 그 뒤 5년 후에 전주막부(全州幕府)로 나가 2년 동안에 무릇 유력(遊歷)한 바가 자못 많았다. 그러나 매양 강산(江山)ㆍ풍월(風月)을 만나 휘파람이 겨우 입에서 나올 듯하면 부서(簿書)와 옥송(獄訟)이 번갈아 시끄럽게 침노하여 겨우 1연(聯) 1구(句)를 얻고 그마저 다 이루지 못한 것이 많았으므로 전편을 얻은 것은 불과 60여 수뿐이었다.

 

 그러나 열군(列郡)의 풍토(風土)와 산천의 형승(形勝)으로 기록할 만한 것이 있으되, 창졸간에 그것을 능히 가영(歌詠)에다 나타내지 못할 경우에는 간략하게 단전(短牋)ㆍ편간(片簡)에 써서 일록(日錄)이라고 하였는데, 거기에는 방언(方言)과 속어(俗語)를 섞어 썼다.

 

 경신년(1200, 신종 3) 계동(季冬) 서울에 들어와 한가히 있을 때 비로소 그것을 꺼내 보았더니 너무 소략해서 읽을 수가 없었으니, 자신이 기록한 것인데도 도리어 우습기만 하였다. 그래서 다 가져다가 불살라버리고 그 중에서 한두 가지 읽을 만한 것을 모아서 우선 차례로 적어보겠다.

 

 전주(全州)는 완산(完山)이라고도 일컫는데 옛날 백제국(百濟國)이다. 인물이 번창하고 가옥이 즐비하여 고국풍(故國風)이 있었다. 그러므로 그 백성들은 질박하지 않고 아전들은 모두 점잖은 사인(士人)과 같아, 행동거지의 신중함이 볼 만하였다.

 

 중자산(中子山)이란 산이 가장 울창하니, 그 고을에서는 제일 큰 진산(鎭山)이었다. 소위 완산(完山)이란 산은 나지막한 한 봉우리에 불과할 뿐인데, 한 고을이 이로써 부르게 된 것은 참으로 이상하다.

 

 주 소재지에서 1천 보(步)쯤 떨어진 지점에 경복사(景福寺)가 있고 그 절에는 비래방장(飛來方丈)이 있다. 이것을 내가 예전부터 들었으나 사무에 바빠서 한 번 찾아보지 못하였다가 하루는 휴가를 이용하여 결국 가보았다.

 

 이른바 ‘비래방장’이란 것은 옛날 보덕대사(普德大士)가 반룡산(盤龍山 함흥(咸興)에 있다)으로부터 날려서 옮겨온 당(堂)이다. 보덕(普德)의 자(字)는 지법(智法)인데, 일찍이 고구려 반룡산 연복사(延福寺)에 거처하더니, 하루는 갑자기 제자에게 말하기를,

 

 “고구려가 도교(道敎)만을 존숭하고 불법(佛法)을 숭상하지 않으니, 이 나라는 반드시 오래가지 못할 것이다. 피난을 해야 하겠는데 어느 곳이 좋을까?”

 

하자, 제자 명덕(明德)이 말하기를,

 

“전주에 있는 고달산(高達山)이 바로 편안히 머무를 만한 땅입니다.”

 

하였다. 건봉(乾封) 2년(667, 보장왕 26) 정묘 3월 3일에 제자가 문을 열고 나와 보니, 당(堂)이 이미 고달산으로 옮겨갔는데, 반룡산에서 1천여 리의 거리였다. 명덕이 말하기를,

 

 “이 산이 비록 기절(奇絶)하기는 하나 샘물이 없다. 내가 만일 스승이 옮겨올 줄 알았더라면 반드시 옛 산에 있는 샘물까지 옮겨왔을 것이다.”

 

하였다. 최치원(崔致遠)이 전(傳)을 지어 이에 대한 것을 자세히 기록하였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약한다.

 

 11월 기사일(己巳日)에 비로소 속군(屬郡)들을 두루 다녀 보았더니, 마령(馬靈)ㆍ진안(鎭安)은 산곡간(山谷間)의 옛고을이라, 그 백성들이 질박하고 미개하여 얼굴은 원숭이와 같고, 배반(杯盤)이나 음식에는 오랑캐의 풍속이 있으며, 꾸짖거나 나무라면 형상이 마치 놀란 사슴과 같아서 달아날 것만 같았다.

 

 산을 따라 감돌아 가서 운제(雲梯)에 이르렀다. 운제에서 고산(高山)에 이르기까지는 높은 봉우리와 고개가 만길이나 솟고 길이 매우 좁으므로 말에서 내려 걸어갔다. 고산은 다른 군에 비하여 질이 낮지 않았다. 고산에서 예양(禮陽)으로, 예양에서 낭산(朗山)으로 갔는데, 모두 하룻밤씩 자고 갔다.

 

 다음날 금마군(金馬郡)으로 향하려 할 때 이른바 ‘지석(支石 고인돌)’이란 것을 구경하였다. 지석이란 것은 세속에서 전하기를, 옛날 성인(聖人)이 고여놓은 것이라 하는데, 과연 기적(奇迹)으로서 이상한 것이 있었다.

 

 다음날 이성(伊城)에 들어가니, 민호(民戶)가 조잔(凋殘)하고 이락(籬落)이 소조(蕭條)하여 객관(客館)도 초가(草家)요, 아전이라고 와 뵙는 자는 4~5인에 불과하였으니, 보기에 측은하고 서글펐다.

 

 12월에 조칙(朝勅)을 받들어 변산(邊山)에서 벌목(伐木)하는 일을 맡아보았다. 변산이란 곳은 우리나라의 재목창(材木倉)이다. 궁실(宮室)을 수리 영건하느라 해마다 재목을 베어내지만 아름드리 나무와 치솟은 나무는 항상 떨어지지 않는다. 내가 벌목하는 일을 항시 감독하므로 나를 ‘작목사(斫木使)’라고 부른다. 나는 노상에서 장난삼아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군사 거느리고 권세부리니 그 영화 자랑할 만한데 / 權在擁軍榮可詑  

벼슬 이름 작목사라 하니 수치스럽기 그지없네 / 官呼斫木辱堪知  

이는 나의 맡은 일이 담부(擔夫)ㆍ초자(樵者)의 일과 같기 때문이다.

 

 정월 임진일(壬辰日)에 처음 변산에 들어가니, 층층한 봉우리와 겹겹한 멧부리가 솟았다 엎뎠다 구부렸다 폈다 하여, 그 머리나 꼬리의 놓인 곳과 뒤축과 팔죽지의 끝난 곳이 도대체 몇 리인지를 알 수가 없었다.

 

옆에 큰 바다가 굽어보이고 바다 가운데는 군산도(群山島)ㆍ위도(猬島)ㆍ구도(鳩島)가 있는데, 모두 조석으로 이를 수가 있었다. 해인(海人)들이 말하기를,

 

“순풍을 만나 쏜살같이 가면 중국을 가기가 또한 멀지 않다.”  

고 한다. 산중에는 밤[栗]이 많은데 이 고장 사람들이 해마다 이것으로 생계를 유지한다.

 

얼마쯤 가노라니, 수백 보 가량 아름다운 대나무가 마치 삼대처럼 서 있는데, 모두 울타리로 막아놓았다. 대숲을 가로질러 곧장 내려가서 비로소 평탄한 길을 만났다. 그 길로 가서 한 고을에 이르렀더니, 거기는 바로 보안(保安)이란 곳이었다.

 

 밀물이 들어올 때는 평탄한 길이라도 순식간에 바다가 되므로 조수의 진퇴를 보아서 다니는 시기를 정해야 한다. 내가 처음 갈 때에는 조수가 막 들어오는데 사람이 선 곳에서 오히려 50보 정도의 거리는 있었다. 그래서 급히 채찍질하여 말을 달려서 먼저 가려고 하였더니, 종자(從者)가 깜짝 놀라며 급히 말린다. 내가 듣지 않고 그냥 달렸더니, 이윽고 조수가 쿵쾅 하고 휘몰아 들어오는데, 그 형세가 사뭇 만군(萬軍)이 배도(倍道)로 달려오는 듯하여 매우 겁이 났다. 내가 넋을 잃고 급히 달려 산으로 올라가서 겨우 화는 면하였으나, 조수가 거기까지 따라와서 말의 배에 넘실거린다. 푸른 물결, 파란 멧부리가 숨었다 나타났다 하고, 음청(陰晴)ㆍ혼조(昏朝)에 경상(景狀)이 각기 다르며, 구름과 노을이 붉으락푸르락 그 위에 둥실 떠 있어, 아스라이 만첩(萬疊)의 화병(畫屛)을 두른 듯하였다. 눈을 들어 그 경치를 바라볼 때 시를 잘하는 두세 명과 더불어 말고삐를 나란히하고 가면서 함께 읊지 못한 것이 한이었다.

 

 그러나 만경(萬景)이 넋을 건드리매 정서(情緖)가 스스로 뒤흔들려서 시를 지을 생각을 하지 않는데도 나도 모르게 시가 저절로 지어졌다. 일찍이 주사포(主史浦)를 지날 때 밝은 달이 고개에 올라 해변의 모래 벌판을 휘영청 비추어서 기분이 상쾌하기에 고삐를 놓고 천천히 가며 앞으로 푸른 바다를 바라보면서 한참 동안 침음(沈吟)하였더니 마부가 이상히 여겼는데, 그러는 중에 시 한 수를 지었었다…….

 

 윤12월 정미에 또 조정의 영을 받아 여러 고을의 원옥(冤獄)을 감찰하게 되어 먼저 진례현(進禮縣 금산(錦山))으로 향하였다. 산이 매우 높고 들어갈수록 점점 깊숙하여 마치 딴나라의 별경을 밟는 듯하여, 마음이 울적하고 무료하였다. 낮이 지나서야 비로소 군사(郡舍)에 들어가니, 현령(縣令)과 수리(首吏)가 모두 부재중이었다. 밤 2경(更) 무렵에 현령과 수리가 각기 8천 보 밖에서 헐떡거리면서 달려왔다. 그들은 문기둥에 말을 매어놓고 여물을 주지 못하게 경계하였다. 무릇 매우 달린 말은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기 때문이었다.

 

 나는 자는 척하면서 들었다. 그 두 사람이 이 노부(老夫)를 돌보는 데 정성을 다하는 것을 알고서는 부득이 술자리를 허락하였다. 한 기생이 비파(琵琶)를 타는데, 꽤 들을 만하였다. 내가 다른 고을에서는 술을 마시지 않다가 여기에 와서 유쾌히 마시고 또 현악(絃樂) 소리를 들었으니, 그것은 아마 머나먼 길을 달려왔으므로 마치 딴나라에 들어온 기분으로 사물을 보고 쉽게 감동되어 그런 것이리라.

 

 진례현에서 떠나 남원부(南原府)에 이르렀다. 남원은 옛날의 대방국(帶方國)이다. 객관(客館) 뒤에 죽루(竹樓)가 있는데, 한적하여 사랑스럽기에 하룻밤을 자고 떠났다.

 

 경신년 춘3월에 또 바다를 따라 배를 조사할 때 수촌(水村)ㆍ사호(沙戶)ㆍ어등(漁燈)ㆍ염시(鹽市)를 유열(遊閱)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 만경(萬頃)ㆍ임피(臨陂)ㆍ옥구(沃溝)에 들러 며칠을 묵고 떠나 장사(長沙)로 향하였다. 길가에 한 바위가 있고 바위에 미륵상(彌勒像)이 우뚝 서 있는데, 그것은 바로 바위를 쪼아 만든 것이었다. 그 미륵상에서 몇 보 떨어진 지점에 또 속이 텅 빈 큰 바위가 있었다. 그 안을 경유하여 들어갔더니, 땅이 점차 넓어지고 위가 갑자기 환하게 트이며 집이 굉장히 화려하고 불상이 준엄하게 빛났는데 그것이 바로 도솔사(兜率寺)였다. 날이 저물기에 말을 채찍질해 달려서 선운사(禪雲寺)에 들어가 잤다.

 

 다음날 장사에 들렀다 장사에서 떠나 무송(茂松)에 이르렀는데, 모두 잔폐(殘弊)한 작은 고을인지라, 기록할 만한 일이 없었다. 그래서 다만 바다를 따라 배를 조사하고 척수를 계산했을 뿐이다.

 

평소에 샘 하나 못 하나를 만나면 움켜마시기도 하고 헤엄치기도 하여 그지없이 애완(愛翫)하였던 것은, 강해(江海)를 그리워하되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제는 바다와 함께 노닌 지 오래라,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물이요, 귀에 들리는 것도 역시 물이 고함치는 소리이므로 싫증이 날 지경이다.

 

왜 하느님은 마치 배고픈 자를 갑자기 배불리 먹여서 도리어 맛있는 음식을 물리치게 하는 것처럼 이같이 실컷 먹이는가?

 

이해 8월 20일은 내 선군(先君)의 기일(忌日)이었다. 하루 앞서 변산 소래사(蘇來寺)에 갔는데, 벽 위에 고(故) 자현거사(資玄居士)의 시가 있으므로 나도 2수를 화답하여 벽에 썼다.

 

다음날 부령 현령(扶寧縣令) 이군(李君) 및 다른 손님 6~7인과 더불어 원효방(元曉房)에 이르렀다. 높이가 수십 층이나 되는 나무 사다리가 있어서 발을 후들후들 떨며 찬찬히 올라갔는데, 정계(庭階)와 창호(窓戶)가 수풀 끝에 솟아나 있었다. 듣건대, 이따금 범과 표범이 사다리를 타고 올라오다가 결국 올라오지 못한다고 한다. 곁에 한 암자가 있는데, 속어에 이른바 ‘사포성인(蛇包聖人)’이란 이가 옛날 머물던 곳이다. 원효(元曉)가 와서 살자 사포(蛇包)가 또한 와서 모시고 있었는데, 차를 달여 효공(曉公)에게 드리려 하였으나 샘물이 없어 딱하던 중, 이 물이 바위 틈에서 갑자기 솟아났는데 맛이 매우 달아 젖과 같으므로 늘 차를 달였다 한다. 원효방은 겨우 8척쯤 되는데, 한 늙은 중이 거처하고 있었다. 그는 삽살개 눈썹과 다 해어진 누비옷에 도모(道貌)가 고고(高古)하였다. 방 한가운데를 막아 내실(內室)과 외실(外室)을 만들었는데, 내실에는 불상(佛像)과 원효의 진용(眞容)이 있고, 외실에는 병(甁) 하나, 신 한 켤레, 찻잔과 경궤(經机)만이 있을 뿐, 취구(炊具)도 없고 시자(侍者)도 없었다. 그는 다만 소래사에 가서 하루 한 차례의 재(齋)에 참여할 뿐이라 한다. 나의 배리(陪吏)가 슬그머니 나에게 말하기를,

 

“이 대사는 일찍이 전주에 우거했었는데, 이르는 곳마다 힘을 믿고 횡포하매, 사람들이 모두 성가시게 여기더니 그 뒤 간 곳을 몰랐는데, 지금 보니 바로 그 대사이옵니다.”

 

하였다. 내가 탄식하여 말하기를,

 

“대저 중품ㆍ하품의 사람은 그 기국이 일정하기 때문에 변동이 없지만, 악(惡)으로써 사람을 놀라게 하는 자는 그 기국이 보통 사람과 다르므로 한번 선(善)으로 돌아오면 반드시 이처럼 초월하는 것이다. 옛날에 사냥하던 장수가 우두 이조대사(牛頭二祖大士)를 만나 허물을 고치고 선을 닦아 마침내 숙덕(宿德)을 이루었고, 해동(海東)의 명덕대사(明德大士)도 매사냥을 하다가 보덕성사(普德聖師)의 고제(高弟)가 되었으니, 이런 유로 미루어본다면, 이 대사가 마음을 고쳐 개연(介然)히 특이한 행실을 닦게 된 것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하였다.

 

또 이른바 ‘불사의 발장(不思議方丈)’이란 것이 어디에 있는가를 물어서 구경하였는데, 그 높고 험함이 효공의 방장의 만배였고 높이 1백 척쯤 되는 나무사다리가 곧게 절벽에 걸쳐 있었다. 3면이 모두 위험한 골짜기라, 몸을 돌려 계단을 하나씩 딛고 내려와야만 방장에 이를 수가 있다. 한번만 헛디디면 다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다.

 

나는 평소에 높이 한 길에 불과한 누대(樓臺)를 오를 때도 두통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정신이 아찔하여 굽어볼 수 없던 터인데, 이에 이르러는 더욱 다리가 와들와들 떨려 들어가기도 전에 머리가 벌써 빙 돈다. 그러나 예전부터 이 승적(勝跡)을 익히 들어오다가 이제 다행히 일부러 오게 되었는데, 만일 그 방장을 들어가 보지 못하고 또 진표대사(眞表大士)의 상(像)을 뵙지 못한다면 뒤에 반드시 후회할 것이다. 그래서 어정어정 기어 내려가는데, 발은 사다리 계단에 있으면서도 금방 떨어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드디어 들어가서 부싯돌을 쳐서 불을 만들어 향(香)을 피우고 율사(律師)의 진용(眞容)에 예배하였다. 율사는 이름이 진표(眞表)이며 벽골군(碧骨郡) 대정촌(大井村) 사람이다. 그는 12살 때 현계산(賢戒山) 불사의암(不思議巖)에 와서 거처하였는데 현계산이 바로 이 산이다. 그는 명심(冥心)하고 가만히 앉아 자씨(慈氏 미륵보살)와 지장(地藏 지장보살)을 보고자 하였으나 며칠이 지나도록 보이지 않자 이에 몸을 구렁에 던지니, 두 명의 청의동자(靑衣童子)가 손으로 받으면서 말하기를,

 

“대사의 법력(法力)이 약한 때문에 두 성인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였다. 그래서 그는 더욱 노력하여 삼칠일(三七日)에 이르니, 바위 앞 나무 위에 자씨와 지장이 현신(現身)하여 계(戒)를 주고, 자씨는 친히 《점찰경(占察經)》 2권을 주고 아울러 1백 99생(栍)을 주어 도왕(導往 중생을 인도해 감)의 도구로 삼게 하였다. 그 방장은 쇠줄로 바위에 박혀 있기 때문에 기울어지지 않는데, 세속에서 전하기를 바다 용이 그렇게 한 것이라 한다. 돌아오려 할 때 현재(縣宰)가 한 산꼭대기에 술자리를 베풀고는 말하기를,

 

“이것이 망해대(望海臺)입니다. 제가 공(公)을 위로하고자 먼저 사람을 시켜서 자리를 베풀고 기다리게 했으니, 잠깐 쉬십시오.”

 

하였다. 내가 드디어 올라가서 바라보니, 큰 바다가 둘러 있는데, 산에서 거리가 겨우 백여 보쯤 되었다. 한 잔 술, 한 구 시를 읊을 때마다 온갖 경치가 제 스스로 아양을 부려 도무지 인간 세상의 한 점 속된 생각이 없어 표연히 속골(俗骨)을 벗고 날개를 붙여 육합(六合) 밖으로 날아나가는 듯, 머리를 들어 한 번 바라보니 장차 뭇 신선을 손짓하여 부를 듯하였다. 동석한 10여 인이 다 취하였는데, 내 선군의 기일(忌日)이므로 관현(管絃)과 가취(歌吹)만이 없을 뿐이었다.

 

무릇 내가 지난 곳에 기록할 만한 것이 없으면 적지 않았다. 대저 경사(京師)를 몸으로 보고 사방(四方)을 지체(支體)로 보면, 내가 노닌 곳은 남도의 한쪽, 한 지체 중에도 한 손가락일 뿐이다. 하물며 이 기록은 다 잊고 빠뜨린 나머지인데 어찌 후일의 볼 만한 것이 되랴? 우선 이것을 간직하여, 뒤에 동서남북을 모조리 노닐며 온통 기록할 때를 기다렸다가 합하여 1통(通)을 만들어서 늘그막에 소일할 자료를 삼는 것도 또한 좋지 않겠는가?

 

신유년 3월 일에 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