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달 (Full Moon) 2019. 8. 23. 09:17




지렁이들

 

                                  이경림

 

가을비 잠깐 다녀가신 뒤

물기 질척한 보도블럭에 지렁이 두 분 뒹굴고 계십니다

 

한분이 천천히 몸을 틀어

S?

물으십니다 그러니까 다른 한 분,

천천히 하반신을 구부려

L…… 하십니다

그렇게 천천히

U? 하시면

C……하시고

J? 하시면

O……하시고


쬐한 가을 햇살에

붉고 탱탱한 몸 시나브로 마르는 줄 모르고

그분들, 하염없이 동문서답 중이십니다

 

그사이, 볼일 급한 왕개미 두 분 지나가시고

어디선가 젖은 낙엽 한 분 날아와 척, 붙으십니다


아아, 그때, 우리

이목구비 계셨습니까?

주둥이도 똥구멍도 계셨습니까?

그 진창에서 도대체

당신은 몇 번이나 C하시고

나는 또 몇 번이나 S 하셨던 겁니까?

 

                                            시집『급! 고독』, 창작과 비평사, 2019. 3.



 

이 시의 경어체는 비아냥을 위한 의도적 전략이다. 지렁이는 두 마리만 모여도 저마다 몸짓이 다르다. 시인은 그것을 문답으로 잡아낸다. S,L,U,J,O 모양의 지렁이의 몸짓은 여러 의미로 해석될 여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방식은 동문서답일 것임이 확실하다. 서로 자기 말로만 핏대를 올리다 가을 햇살에 말라버리는 것이 우리의 일생이 아닌가? 이 시는 묻고 있다.           

                                                                         손진은(경주대 교수)가 선정한 좋은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