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렁이들
지렁이들
이경림
가을비 잠깐 다녀가신 뒤
물기 질척한 보도블럭에 지렁이 두 분 뒹굴고 계십니다
한분이 천천히 몸을 틀어
S?
물으십니다 그러니까 다른 한 분,
천천히 하반신을 구부려
L…… 하십니다
그렇게 천천히
U? 하시면
C……하시고
J? 하시면
O……하시고
쬐한 가을 햇살에
붉고 탱탱한 몸 시나브로 마르는 줄 모르고
그분들, 하염없이 동문서답 중이십니다
그사이, 볼일 급한 왕개미 두 분 지나가시고
어디선가 젖은 낙엽 한 분 날아와 척, 붙으십니다
아아, 그때, 우리
이목구비 계셨습니까?
주둥이도 똥구멍도 계셨습니까?
그 진창에서 도대체
당신은 몇 번이나 C하시고
나는 또 몇 번이나 S 하셨던 겁니까?
시집『급! 고독』, 창작과 비평사, 2019. 3.
이 시의 경어체는 비아냥을 위한 의도적 전략이다. 지렁이는 두 마리만 모여도 저마다 몸짓이 다르다. 시인은 그것을 문답으로 잡아낸다. S,L,U,J,O 모양의 지렁이의 몸짓은 여러 의미로 해석될 여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방식은 동문서답일 것임이 확실하다. 서로 자기 말로만 핏대를 올리다 가을 햇살에 말라버리는 것이 우리의 일생이 아닌가? 이 시는 묻고 있다.
손진은(경주대 교수)가 선정한 좋은시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