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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는 벼끼리 피는 피끼리

온달 (Full Moon) 2019. 9. 5. 20:30




벼는 벼끼리 피는 피끼리

 

                                       하종오

 

우리야 우리끼리 하는 말로

태어나면서도 넓디넓은

평야 이루기 위해 태어났제

아무데서나 푸릇푸릇 하늘로 잎 동아내고

아무데서나 버려져도 흙에 뿌리박았는기라

먼 곳으로 흐르던 물줄기도 찾아보고

날뛰던 송장메뚜기 잠재우기도 하고

농부들이 흘린 땀을 거름 삼기도 하면서

우리야 살기는 함께 살았제

오뉴월 하루볕이 무섭게 익어서

처음으로 서로 안고 부끄러워 고개 숙였는기라

우리야 우리 마음대로 할 것 같으면

총알받이 땅 지뢰밭에 알알이 씨앗으로 묻혔다가

터지면 흩어져 이쪽 저쪽 움돋아

우리나라 평야 이루며 살고 싶었제

우리야 참말로 참말로 참말로

갈라설 수 없어 이 땅에서 흔들리고 있는 기라

 

 

시인 하종오(河鍾五, 1954~ )

경북 의성에서 태어나 1975년 『현대문학』에 「허수아비의 꿈」 등이 추천. 전통적인 서정시를 쓰던 그는 『반시』 동인에 참여하며 사회성이 강한 시를 내놓더니 민중 시인으로서는 드물게 이야기시와 굿시라는 실험적 양식의 시를 선보여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는 이제까지 『벼는 벼끼리 피는 피끼리』(1981) · 『사월에서 오월로』(1984) · 『분단동이 아비들하고 통일동이 아이들하고』(1986) · 『넋이야 넋이로다』(1986) · 『정』(1987) · 『어미와 참꽃』(1989) · 『꽃들은 우리를 봐서 핀다』(1989) · 『젖은 새 한 마리』(1990) · 『님시편』(1994) · 『쥐똥나무 울타리』(1995) · 『사물의 운명』(1997) 등의 시집을 펴낸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