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인칭 에세이’ 가능할 것일까?
‘3인칭 에세이’ 가능할 것일까?
석현수
에세이는 1인칭의 자기 그리기 문학 장르다. 설마 소설을 닮은 에세이를 쓰자는 것은 아니겠지. 나를 감쪽같이 가리고 독자를 속이는 일은 에세이의 본령을 거스르는 일이다. 에세이는 어디까지나‘나’를 중심으로 한 1인칭의 글이어야 한다.
1. 수필은 ‘나’의 글이다.
에세이 쓰기 초입에서부터 들어온 수필 문학의 성격은 이러하다. 에세이는 ‘나’로부터 시작되는 1인칭의 글이라는 점이다. 에세이는 “1인칭의 문학이며 자기 관조를 통해 좀 더 나은 정신세계를 지향하는 자아의 투영”이라든가, “나의 시각에서 쓰이는 글”, 그리고 수필은 “자기 고백적인 문학”이란 말이 거듭 반복되고 있다. 註2) 역으로 ‘1인칭’을 전제로 한 글쓰기가 아니고서는 에세이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에세이의 태생적 운명이라 바꾸어 말해도 좋겠다. 이 뿌리는 몽테뉴에게 있다. 몽테뉴는 그의 『수상록(Les Essais)』 서문에서 자신의 글에 대한 성격을 이렇게 규정해 놓았다. “이 작문은 처음부터 내 집안일이나 개인적인 일을 말해 보는 것밖에는 다른 어떤 목적도 있지 않았음을 말해둔다.”라든가, “여기서는 나 자신이 바로 내 책의 재료다.”라고 했다. 註3) 짧은 머리말 속에 거듭하여 중언부언한 것은 가식이나 꾸밈이 없는 자신의 이야기를 쓰겠다는 글의 성격을 규정해놓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2. 소설과 에세이의 차별화가 3인칭이다.
산문을 대표하는 것이 소설과 에세이다. 같은 산문이면서도 두 장르의 형식은 확연히 다르다. “에세이는 주관적 산문으로서 서사적 상황이 주관적 체험 사실에 포함, 함축되어 구체적 경험으로 제시되고, 이에 비해 소설은 서사적 산문으로서 인물과 사건을 서사적 형식을 통해 객관적 세계를 펼치고 이에 주제와 작가 정신이 내포되므로 그 방법의 양상이 수필과 다른 형식의 산문이다.” 註4) 소설은 ‘허구를 통한 산문적인 문학 형식’인 반면, 에세이는 ‘주관적’인 글이면서 짧은 산문 형식’을 취한다. 에세이는 생활 체험이 바탕이 되므로 소설처럼 허구적이거나 미화하지 않는다. 에세이 문학이란 객관적으로 제시되는 사물에 대해 작자가 주관적으로 반응하는 정신을 결합하는 산문문학이다. 같은 산문이면서 에세이는 ‘체험’이 주가 되는 1인칭의 글이지만 소설은 작중인물인 ‘3인칭’이 주된 글이다. 이런 이유에서 소설을 읽는 사람은 작가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허구’의 지어낸 이야기인 줄 알고, 에세이집이라면 작자 자신의 진솔한 이야기라고 말하지 않아도 으레 그런 유의 글일 줄을 알고 작품집을 대한다. 문학 장르의 구분이 그렇게 변별하도록 안내해주는 편리함 덕분이다.
3. ‘3인칭 에세이’란 신조어는 가능한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실현 불가능하다. 에세이가 1인칭의 글이라고 정의를 내렸으니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하여야 한다. 3인칭 에세이란 남의 이야기를 가지고 에세이를 쓴다는 말이 되어 앞뒤가 맞지 않는다. 3인칭으로 쓰겠다면 그는 에세이가 아닌 소설을 쓰겠다고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간혹 1인칭 화자가 등장하는 자전적 소설이 있다. 많은 부분에 작자의 체험담이 실리지만 독자들의 흥미를 위해 요소요소에 소설의 본령인 허구성이 가미되어진다. 독자들은 사실과 허구의 차이를 분간해 낼 수 없어 모두를 작가의 이야기로 착각하지도 않을뿐더러, 전부 꾸며낸 이야기라는 속단도 하지 않는다. 작자 자신이 자전적 소설이라고 표제를 달기 전에는 그 경계가 모호하다.
1인칭의 ‘소설’이 존재할 수 없듯, 3인칭의 ‘에세이’도 존재할 수 없다. 간혹 에세이 속에서도 타자의 이야기를 인용할 경우가 있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글을 풀어가는 전개 과정에서 문학성을 더하기 위한 의인화하는 과정일 뿐이다.
근간에 수기 공모의 사례가 늘고 있어 에세이를 수기처럼 쓰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또한 에세이와 수기의 다른 점을 모르는 까닭이다. “수기는 자신을 드러낸다는 점에서는 에세이와 같은 맥락을 지니나 문예적으로 주제를 붙이는 글이 아니며 사실적 개념의 자전적 기록일 뿐이다.” 註5)
4. 낯설게 하기에 활용되는 3인칭의 경우
에세이에서는 글을 낯설게 하려고 ‘가상의 3인칭’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가상의 3인칭도 결국 뿌리는 ‘나’로부터 출발하는 1인칭의 낯설게 하기일 뿐이며 결코 타자를 지칭하는 별개의 인칭대명사가 아니다.
문장의 수사修辭 중에는 의인법擬人法이란 것이 있다. “사람이 아닌 어떠한 사물이나 추상 개념에 인격적 요소를 부여해서 사람과 같은 행동을 하는 것으로 표현하는 방법이다.” 註6) 나의 ‘눈’ 나의 ‘귀’ 심지어 나의 ‘꿈’, ‘양심’, ‘혼령’ 등이다. 에세이에서 의인법은 한결같이 ‘나’가 중심이 된 유형무형의 또 다른 ‘나’이다. 이 방법은 문학성을 높인다는 의도에서나 글의 지루함을 피하고자 쓰며 다른 말로는 활유법活喩法이라고도 한다.
예를 들어보자.
“ 내 몸이 반란을 시작했다. 아파트 입구에서 경례를 붙이는 아저씨께 고개를 숙이는데 등이 당기고 아프다. 이 황당한 인사법이 마땅치 않지만, 어찌해 볼 방법이 없어 민망한 몸짓으로 넘기고 있다. 어깨도 아프다. 할 일을 두고 못 보는 못된 성질 탓으로 어깨가 혹사당했나 보다. 쑤셔 오면서 거북하다. 고장이 날 만도 하지 얼마나 오랫동안 썼는가. 그간 잘 버티어준 것이 고맙지.”註7)
노정숙의 「내 몸의 반란」에서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나’가 아닌 ‘몸’이다. 내 몸은 비록 별개의 ‘그’ 같은 느낌이지만 결국 ‘나’에 대한 이야기로 되돌아간다. 글 속에서 반복될 수밖에 없는 ‘나’라는 1인칭을 피해 ‘내 몸’이란 가상의 ‘그’를 등장시킴으로 문장을 잠시나마 낯설게 하며 글맛을 나게 해 준다.
“아이들이란 어른들의 어렸을 적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한다. 그들은 상상력을 발휘해서 한 번도 보지 못한 그 옛날의 증조부나 할머니가 어떤 분이었는지 알고 싶어 한다. 며칠 전 저녁. 나의 어린 것들이 그들의 증조모 펄인 필드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자 내 앞에 모여든 까닭도 이런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중략. 그러고 나서 금방 정신이 들자, 나는 독신자의 안락의자에 얌전히 몸을 기대고 깜빡 잠들었던 것을 깨닫게 되었다 ” 註8)
찰스 램 「꿈속의 아이들」에서
윗글은 찰스 램 자신의 환상의 꿈을 소재로 한 에세이다. 그러나 글 말미에 자신의 꿈속에서에서 한 이야기였음을 밝혀놓고 있어 읽는 이를 혼란스럽지 않게 장치를 해 놓았다. 왜냐하면, 찰스 램은 결혼도 하지 않았고, 실제로 자식도 없으면서 아이들, 부인을 등장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꿈 이야기란 전제하에서는 얼마든지 상상의 날개를 달 수 있어서 아이들과 같이 생활하고 이루지 못한 첫사랑이 그의 부인이 되어 곁에 있기도 하다. 이는 곧 찰스 램의 사유 속에서 언제나 떠나지 않는 가정생활에 대한 동경이 꿈속이란 형태로 표현되었다. 글 속의 ‘그’는 다름 아닌 현실에서 ‘나’가 이루지 못한 것을 대신하는 작자 자신의 환영이다. 문학적 상상 속에 빌려 쓰는 ‘가상의 3인칭’이다.
한 가지 예를 더 들어보자.
“내가 산으로 거처를 옮긴 지도 벌써 십수 년이 흘렀다. 띠 풀로 지붕을 이고, 흙벽으로 방을 꾸며 작은 한 몸 누웠으니 심신이야 그지없이 편안하다. ~중략~ 긴긴 인생 함께 살다 늘그막이 홀로된 손씨녀는 무슨 미련 그리 많고 어떤 영화를 누리기에 한 자리에 눌러앉아 떠나올 줄 모르는가. 세상 사람 말과 달리 이곳에도 봄이 오면 양지 녘에 햇볕 들고, 온갖 잡새 노래 불러, 터를 잡고 누우면 살 만한 세상이라. 부디 잰걸음으로 달려와 다시 한번 손을 잡고 남은 인연, 마저 이어보면 어떨는지 축원하고 축수한다.” 註9)
홍억선의「화령별곡花嶺別曲」에서
가상의 3인칭으로 등장시킨 ‘그’가 이야기를 끌어가고 있지만 결국 1인칭인 작가의 말을 대신하고 있다. 이 3인칭은 작자의 사후 세계에서 일어날 일들을 머릿속에서 상상 화한 ‘나’의 훗날 사후 모습이다. 작자는 영혼에도 생전처럼 기뻐할 줄도 섭섭해할 줄도 아는 감정을 주어 ‘나’를 대역시키고 있다. 비록 산속에 거처가 옮겨져 있어도 아내를 기다리는 마음은 변치 않고 있다. 죽음의 길인 줄을 번연히 알면서까지 아내가 왜 이렇게 늦게 오느냐며 투정을 부리고 있다. 작자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오매불망 아내 ‘손 씨’의 이름을 부를 것이리라. 길고 긴 부부간 인연을 이보다 더 간절하고 애틋하게 그려낼 수 있을 것인가? 영혼이란 가상의 3인칭을 대역시킴으로써 자칫 느끼하고 진부해질 수 있는 가족 사랑 이야기를 한 단계 더 승화시킬 수 있었다고 본다.
이처럼 에세이에서의 3인칭에 대한 사용 한계란 어디까지나 작자 자신과 유관한 유형무형의 것들에 대한 대명사(代名詞)로 제한된다. 이런 점에서 조침문(弔針文)에서의 의인화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같은 의인화일지라도 풍자나 작자와 아무런 관련을 지을 수 없는 것은 에세이가 될 수 없다. 바늘이 부러짐을 애통해하거나 규중칠우쟁론기에서 자, 가위, 바늘, 실, 인두, 다리미, 골무를 사람으로 형상화한 이야기 등이 좋은 예다. 비록 이것들이 의인화되어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서로 경쟁하고 질투하면서 인간세계를 풍자하고는 있지만, 이는 일종의 애니메이션 같은 것이어서 에세이와는 저만치 멀리 떨어져 있다.
5, 내가 아닌 남이 주인이 된 글은 에세이가 아니다.
“자식은 돈을 벌러 외지에 가서 백골로 돌아오고, 딸은 돈벌이로 호텔에서 웃으면서 나온다. 죽은 자식은 잊으면 그만이다. 외국 손님 품에서 시달리는 딸년은 약간 애처롭지만, 아침에 웃고 들어오는 얼굴은 역시 해사하다. 그러나 기쁜 것은 돈이다. 판잣집이 양옥이 되고 골덴텍스 양복에 제법 반반한 신사가 된 것도 다 이 친구의 덕이다. ~중략~ 돈이 더럽다고 젓가락으로 뇌까리던 선비의 후손은 이렇게 황금 앞에 충신으로 변했다. 그리고 소원대로 복을 받아 이제는 남 앞에 어깨가 으쓱해졌다. 그런데 어느 날 그는 술을 먹고 채신머리없이 목을 놓아 울고 있었다. 왜 우느냐고 물었더니, 그것은 자기도 모른다는 것이다.” 註10)
윤오영 「왜 울었던고」에서
혹자는 이것이 짧은 글이지만 감동은 천 매보다 더 크고 그 떨림이 오래 남는 에세이라고 평하는 이도 있다. 「왜 울었던고」는 처음부터 끝까지 ‘나’가 없는 ‘그’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혹시 윤오영 작가 자신의 이야기를 ‘그’라는 가상의 3인칭을 빌려다 쓴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그럴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이러한 오해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글의 결미에서 단호히 이 글은 ‘나’에 관한 고백이 아니라 제3의 인물인 ‘그’의 이야기임을 못 박고 있다. 전후의 참담한 사회상을 그려낸 작가의 만평漫評으로 보아야 할 개연성이 다분히 크다. 윤오영 작가가 쓴 글이어서 무조건 에세이일 것이라는 것은 착각일 수도 있다. 수필가는 수필만 쓰는 것이 아니다. 이는 경주 돌이 모두 옥석이어야 하는 억지를 윤오영 작가에게 주문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14년 전 섣달그믐날 밤, 모자 셋이서 1인분의 우동을 주문했던 사람입니다. 그때의 한 그릇의 우동에 용기를 얻어 세 사람이 손을 맞잡고 열심히 살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 후, 저는 금년 의사 국가시험에 합격하여 교오또의 대학병원에서 소아과의 병아리 의사로 근무하고 있습니다만 내년 4월부터 삿포로의 종합병원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동집 주인은 되지 않았습니다만, 교토의 은행에 다니는 동생과 상의해서, 지금까지 삶 가운데 최고의 사치스러운 것을 계획했습니다. 그것은, 섣달그믐 날 어머님과 셋이서 삿포로의 <북해 정>을 찾아와 3인분의 우동을 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면서 듣고 있던 여주인과 주인의 눈에서 왈칵 눈물이 넘쳐흘렀다.” 註11)
구리 료헤이 「우동 한 그릇」에서
글의 구성이 에세이하고는 다소 거리가 있을 수 있겠으나, ‘실화’냐, 아니면 ‘허구’냐에 따라 독자들의 반응은 크게 달라진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이 글을 굳이 인용해 보았다. 구리 료헤이의 이 작품은 실화라는 전제로 큰 반향을 이루었지만, 실화가 아닌 작가의 창작 작품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밝힘으로써 독자들의 반응은 시들해져 버렸다. 작가 자신의 실제 체험이라 믿고 눈물을 쏟아가며 반응하던 독자들이 가졌던 충격이 컸던 모양이다. ‘3인칭’ 에세이가 출현한다면 글의 말로는 「우동 한 그릇」 꼴이 되고 말 것이다.
에세이에서 3인칭 글쓰기 시도는 에세이 본령을 거스르는 일이며, 소설 같은 에세이를 쓰겠다는 욕망에 불과하다. 수사修辭의 한 방법으로서 ‘의인화’ 기법을 사용할 경우가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작가 자신의 역할을 대신시키는 ‘가상의 3인칭’인 ‘그’가 있을 뿐이다. 에세이는 남의 이야기를 빌려서 자기화하거나, 나를 감쪽같이 가리고 ‘그’의 일인 양 포장하는 그런 장르가 아니다. 에세이는 어디까지나 ‘나’를 중심으로 한 1인칭의 글이어야 한다.
註1) 이철호 『수필 창작의 이론과 실기』 (서울: 정운, 2005) p.51
註2) 장사현 『수필문학 총서』 (서울: 북랜드, 2013), pp. 47-51 <수필창작 이론>에서 요약
註3) 몽테뉴 『수상록 Les Essais』 (서울: 동서 문화사, 2007) p. 7 <이 책을 읽는 이에게>
註4) 이우경 『한국 산문의 형식과 실제』 (경기: 집문당, 2004) p.252<수필과 소설의 관계>
註5) 장사현의 위의 책 『수필문학 총서』 p.86 <수기와는 어떻게 다른가?>
註6) 황송문 『글쓰기의 이론과 실제』 (서울: 국학자료원, 2002) p.235 <의인법>
註7) 윤재천 『여류 수필 작품론』 (서울: 세손출판회사, 2003) p.207 <노정숙의 수필 세계>
註8) 찰스 램 『엘리아 수필집』 (서울: 아이필드, 2003), p. 139 <꿈속의 어린이들>
註9) 윤재천 『오늘의 한국 대표 수필 100인선』 (서울: 문학관. 2013) pp. 467~470 <홍억선, 화령별곡>
註10)정주환 『수필의 양식과 구성의 원리』 (서울: 한국문화사, 2003) p.7
註11)구리 료헤이 『우동 한 그릇』 (서울: 청조사, 2002) p.p3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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