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출신입니까?
석현수
세상에 하고 싶은 것 다 해보고 사는 사람이 있을까마는 내가 부러워하고 또 하고 싶어 했던 것 중 하나가 ‘선생님’이다. ‘선생님’에 대한 동경은 어쩌면 남들에게 존경받고 싶어 하는 내 욕구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자주 나더러 선생출신 아니냐고 묻는다. 향 싼 종이에는 향내가 나는 법이라는데, 내게도 고매한 선생님의 인격이 풍겨 모두 나를 선생 대접해 주려는 것일까? 아니면 내 행색과 풍채가 ‘딸깍발이’ 같아 보여서일까.
일석 이희승은 그의 글 <딸깍발이>에서 ‘두 볼이 야윌 대로 야위고, 콧날은 날카롭게 오뚝 서서 꾀와 이지만 이 내발릴 대로 발려있는….’으로 남산골샌님을 묘사하고 있다. 내가 선생님으로 잘 못 불리는 것은 아마도 내 외모에서 풍겨는 깡마른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고 ‘선생님’하고 전혀 인연이 없는 것은 아니다. 내 친구 중에는 유독 ‘선생님’이 많은 편이다. 동창회 모임에 나가면 아직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이들이어서, 조용했던 친구들이 어느 날 갑자기 목소리가 높아지고 실세로 떠올라 부러움을 사고 있다. 이들은 모두 세상 이치에 밝고 말씀들이 정연하여 가까운 곳에 스승을 둔 듯 믿음직스럽다.
‘선생님’의 애환은 애교스런 면이 많다. 특히나 잔심부름시키는 일에는 이들이 고수다. 이 때문에 선생과 학생 사이에는 자잘한 머리싸움이 끊이지 않는다. 선생의 후한 칭찬에는 머리 빠른 녀석은 이내 낌새를 알아차린단다. ‘너 참 착하게 생겼구나.’라는 말에는 ‘하나도 착하지 않아요, 저한테 심부를 시키려고 그러시지요?’라는 응수가 온단다. 앞으로는 ‘선생님’ 꼼수도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시켜야 학생에게 밀리지 않을 것 같다.
식구가 속상하면 나더러 ‘선생출신’이냐고 쏘아붙인다. ‘선생님’이 학생에게 하듯 자기를 리모컨처럼 이래라저래라 하지 말라는 경고가 들어있다. 물 좀 주오, 이거 치어주시오 등등, 내가 생각해도 이 버릇은 충분히 가족의 마음을 상하게 할 수 있겠다 싶다. 그러나 이것이 어찌 나만의 죄이겠는가. 경상도 지방 남정네들이 하는 짓을 어릴 적부터 보고 듣고 자란 것이 이 모양인데 쉽게 고쳐질 수 있으랴. 비록 독소조항이 숨어 내 비위를 건들지언정 선생 출신이냐고 불러주는 것만 가지고도 위안을 삼는다.
‘선생님’은 우리 사회를 건전하게 지켜주는 마지막 보루堡壘이며 지도층 인사들이다. 종교 지도자들이 신자들보다 더 많이 보고 들어야 하며 먹고 사는 것에 매달리지 말아야 하듯, ‘선생님’ 또한 모든 것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생활을 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선생님’ 얼굴이 밝아지면 이를 보고 자라는 학생들의 얼굴도 밝지 않을까 싶다. 자녀가 생선 싼 종이에서 나는 비릿한 생선 냄새를 맡지 않고 자라게 하려면 우리는 ‘선생님’들을 보호하고 존중해야 한다.
친구들은 힘들게 공부하고 고시보다 쉽지 않을 어려운 교사자격증 따고, 임용시험 치르고, 송홧가루 같은 분필 가루 마셔가며, 평생을 아이들과 씨름하며 살아야 ‘선생님’ 소리를 듣는다. ‘선생님’이란 높은 칭송은 꿈에도 꾸지 못했을 내가 초면에 검증도 없이 ‘선생출신’ 아니냐고 많은 사람이 물어 줄 때는 어찌 내가 그들에게 황공하지 아니할까. 평소에도 선생님의 권위에 늘 존경을 보내며 ‘선생님’ 소리가 듣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선생님’이란 어느 정도의 재목이 되어야 하는지를 잘 아는 사람이 어찌하여 이런 질문에 ‘아니다’고 얼른 답을 하지 못할까? ‘선생님’이 좋아서 은근슬쩍 얼버무리고 넘어가려는 것일 게다. 나이 들면 어차피 ‘아저씨’ 대신에 ‘선생님’ 소리는 듣고 사는 법인데 ‘선생님’들 명예에 내가 좀 얹혀살기로서니 무슨 큰 죄 될까 싶어서다. 바짝 마르고 성깔 있는 남산골딸깍발이 같은 외형을 내세우며 은근슬쩍 ‘선생출신’인양하고 어깨를 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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