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 모음/운문 315

저별

저별 어제 누군가가 놓친 저 별 오늘은 누군가의 희망 또는 그리움이 되겠지 오늘 누군가의 가슴에 지는 저별 내일은 또 누군가를 위해 다시 한 번 반짝이리 한번 가면 그만인 하루 그 하루가 얼마나 소중한가를 저별은 말하리 ‘반짝’ 딱 한 번 어둠은 왜 등 뒤에 서 있는가를 온 몸으로 소리하는 샛별 저 어둠이 없으면 별은 더 빛날 밤도 없으리 이광석: 경남의령출생. 1940년 『현대문학』추천. 시집 『겨울나무들』외 10편

가을 앓이

가을 앓이 김필연 가을이 깊어가네 이 계절을 어찌 지내시는가 하늘은 높이도 비어있고 바람은 냉기에 떨고 있네 이 가을 깊은 서정에 가슴 베이지 않을 지혜를 일러주시게 오늘도 그대가 놓고 간 가을과 함께 있네 들려주시게 바람에 드러눕던 갈대처럼 풋풋했던 목소리 보여주시게 붉나무 잎새보다 더 붉던 그대 가슴을 더 붉던 그대 가슴을 가을이 깊어가네 이 계절을 어찌 지내시는가 하늘은 여전히 비어있고 바람도 여전히 떨고 있네 이 가을 깊은 서정에 가슴을 베이지 않을 지혜를 일러주시게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윤동주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물어볼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가벼운 마음으로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사람들을 사랑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맞이하고 있는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하며 살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일이 없었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삶이 아름다웠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기쁘게 대답할 수 있도록 내 삶의 날들을..

예금통장

예금통장 조향미/ 시인, 교사 잔고가 얼마 안 남았다 월금날은 한참 남았다 들여다보니 쌀통 김치 통 꽤 남았다 냉장고에 시든 고추 파 두어 뿌리 평소에 살피지도 않았던 뒤 베란다 감자 양파 몇 알도 쓸 만하다 옷장엔 묵었으나 옷들은 많고 책장엔 읽지 못한 책들도 많다 모든 것은 풍요하고 너끈하다 조금 비어서 기분 좋은 위(胃)처럼 잡풀을 쳐낸 생의 앞마당은 여백이 널찍하고 식탁은 신선한 허기(虛飢)로 풍성하다 예금통장이 빈 도시락처럼 달그락 거릴 때면 푸석 푸석 곰팡이 나는 녹에 파묻혀 있던 낡고 헌 사물들의 말간 얼굴들이 보인다 잘 닦으면 은은히 청동 빛이 난다 또한 뿌듯한 일 며칠 지나도 헐렁한 쓰레기통 죄를 덜 지었다는 증거다 가을볕에 잘 마른 무명수건 처럼 제법 깔깔해진 마음으로 물기 젖은 누구의..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사세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사세 조병화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사세 떠나는 연습을 하며 사세 아름다운 얼굴, 아름다운 눈 아름다운 입술, 아름다운 목 아름다운 손목 서로 다하지 못하고 시간이 되려니 인생이 그러하거니와 세상에 와서 알아야 할 일은 '떠나는 일' 일세 실로 스스로의 쓸쓸한 투쟁이었으며 스스로의 쓸쓸한 노래였으나 작별하는 절차를 배우며 사세 작별하는 방법을 배우며 사세 작별하는 말을 배우며 사세 아름다운 자연, 아름다운 인생 아름다운 정, 아름다운 말 두고 가는 것을 배우며 사세 떠나는 연습을 하며 사세 인생은 인간들의 옛집 아! 우리 서로 마지막 할 말을 배우며 사세

수선화에게

수선화에게 정호승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 퍼진다

돌을 줍는 마음

돌을 줍는 마음 윤 희 상 돌밭에서 돌을 줍는다 여주 신록사 건너편 남한강 강변에서 돌을 줍는다 마음에 들면, 줍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줍지 않는다 마음에 드는 돌이 많아 두손 가득 돌을 움켜쥐고 서 있으면, 아직 줍지 않은 돌이 마음에 들고, 마음에 드는 돌을 줍기위해 이미 마음에 든 돌을 다시 내려 놓는다 줍고, 버리고 줍고, 버리고 또다시 줍고, 버린다 어느덧, 두 손에 마지막으로 남는 것은 빈손이다 빈 손에도 잡히지 않을 어지러움이다 해는 지는데, 돌을 줍는 마음을 사라지고 나도 없고, 돌도 없다

나는 얼마나 그림 같은지

나는 얼마나 그림 같은지 이 향 아 이렇게 쉬이 뒤돌아 볼 줄 알았더라면 슬퍼하지 않아도 될 걸 그랬다. 가라앉은 가을 강 수정 같은 마음으로 '추억이야' 말할 수 있는 날이 이토록 쉬이 올 줄 알았더라면 바장이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지금 이름 높이 부를 빛나는 눈물 있어 나 가난하지 않고 지금 내려놓을 무거운 멍에 있어 나는 얼마나 그림 같은지 나는 얼마나 아름다운지. 이렇게 달빛 우러러 살 줄 알았더라면 눈앞 캄캄하지 않았을 것을. 강물에 무심히 잎새 하나 띄우듯 추억하나 노래처럼 띄어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