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게 가지기
석현수
“이 세상에 처음 태어날 때 나는 아무것도 갖고 오지 않았었다. 살 만큼 살다가 이 지상地上의 적籍에서 사라져 갈 때에도 빈손으로 갈 것이다.” 장안의 화제가 온통 ‘무소유’가 되었다. 말은 쉬워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실로 어렵기에 모든 것 다 떨치고 평상에 모셔져 먼 길 떠나는 법정 스님을 보고서야 중생들은 그분의 참 뜻을 알아보게 된다.
평소 건강하시던 선배 내외가 한 해 차이를 두고 연거푸 세상을 떠났다. 아직 청춘 같은 초로初老라 예기치 못한 일이 너무 빨리 왔다. 선배님은 딸 셋 만을 둔 분 이었다. 삼오를 마치고 나서 큰 딸 내외가 나에게 전화를 했다. 부모님이 평소 생활하시던 물건들이라 어느 것 하나 버리기에는 여간 마음고생이 아니란다. 그렇다고 삼형제가 각자 집으로 가져다 놓기란 단출한 아파트 생활이라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나는 과감히 버리라고 조언을 해 주었다. 꼭 소장해서 가슴에 품어둘 사연 있는 물건이라면 몰라도, 대부분은 자식들이 생각하는 것 보다는 일상의 하찮은 것들이니 너무 마음 쓰지 않아도 된다고 타 일렀다. 책들은 파지로, 쇠붙이는 철물로, 그리고 재활용이 아닌 것은 수거봉투를 이용해서 과감히 버리도록 했다. 고인과 가깝게 지내던 부모 같은 분이 지도하는 일이니 친척이나 이웃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어 내 말이 자식들 마음을 한결 가볍게 해 주었을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면죄부를 준 것이다. 엄두가 나지 않던 집 비우기는 몇 트럭분을 쓰레기로 내다 버린 후에야 매매가 가능해졌다.
출산은 예정일을 알지만 떠나는 일은 예고되는 것이 아니다. 이 분처럼 아무런 준비 없이 갑작스레 큰일을 맞으면 자식들이 얼마나 당황하게 되는지 나로서는 느낀바가 컸다. 나이가 들어가면 하나씩 둘씩 살림살이를 줄여 나가야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제일 먼저 착안한 것이 가장 부피가 큰 서른 권이 넘는 사진첩이었다. 영상으로 스캔을 떠서 CD 한 장으로 담아 놓고는 모두 버렸다. 어느 자식이 부모 것이라는 이유로 이런 짐 덩어리를 모셔갈 것이며, 아니면 부모의 삶이 담긴 사진첩을 감히 자식 손으로 불살라 버릴 수 있을 것인가? 뒤탈이 없으려면 본인이 직접 내다 버리는 것이 최선안이다. 서재 위를 휑하니 비우고 나니 얼마나 마음이 홀가분해 졌는지 모른다.
다음 시선이 간 것이 책이었다. 책을 신주단지로 모시던 때는 옛날이다. 자고 나면 달라지는 세상이 되고 보니 나중에 다시 읽어 볼 양으로 보관해야할 책들은 그리 많지 않다. 예를 들어 컴퓨터 관련 책자들은 1년만 지나면 책이 아니라 폐지덩이가 되어 버릴 정도로 진부해 지지 않는가. 부피가 커서 자리를 많이 차지하던 책도 아쉬운 마음이야 많았지만 정리할 수 있는 한 최대로 줄여 나갔다.
지금까지 모으는 것이 어렵다고 생각하고 살았다. 그러나 더 어려워지는 것은 버리고 줄여가는 일이다. 물건들은 저마다 이런 저런 핑계로 주인의 곁을 떠나려 하지 않는다. 혹시 이러다 나중에 필요하면 어떻게 할 건가요 하고 되물어 올 때는 더욱 망설이게 만든다. 그러나 뒷날 다시 구매하는 일이 있을 지라도 당장 필요한 것이 아니면 버리겠다고 마음을 굳히니 쉽게 가닥이 잡혔다. 법정스님의 무소유가 바른 해법을 준 것이다. “무엇인가를 갖는다는 것은 다른 한편 무엇인가에 얽매인다는 뜻이다. 필요에 따라 가졌던 것이 도리어 우리를 부자유하게 얽어맨다고 할 때 주객主客이 전도되어 우리는 가짐을 당하게 된다. 그러므로 많이 갖고 있다는 것은 흔히 자랑거리로 되어 있지만, 그만큼 많이 얽히어 있다는 측면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요즈음 DVD CD 시대가 오고 보니 VHS 이니 BETA 이니 하던 비데오오 테이프 Video tape가 소용이 없어졌다. 디스켓Diskette 저장 방법이 모두 메모리스틱 Memory stick화 되어 디스켓 조차도 버려야 한다. 어께에 매고 다니던 거추장스런 카메라도 주머니 속의 손바닥 만 한 디지털 카메라 하나면 충분하다.
어쩌면 인생 후반부를 살아가는 방법은 포커게임식으로 살아야 하지 않나 생각이 든다. 한 장 뽑아 올린 놈과 손에 든 놈을 맞춰서 패를 내리기도 하고, 쓸모없는 것들은 한 몫에 던져 버리기도 한다. 내 던지기를 반복하다 보면 손 털고 게임은 끝내는 것이다. 처자식을 먹여 살리고 사회생활을 해 나가야 하는 우리로써는 선방의 스님하고야 입장이 다르겠지. 선배의 경우를 보니 내 주변에 널브러진 잡동사니들이 후일 나의 유품대접을 받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스님의 ‘무소유’無所有 까지는 못 가더라도, 나이 들어가며 가진 것을 줄여 나가는 ‘소小소유’의 마음으로라도 가져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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