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수회의록 (禽獸會議錄)
김 갑영 스님의 글
어느 날 여덟 마리의 금수가 모여 회의를 열게 됐다. 그날의 안건은 인간들의 행위에 대한 옳고 그름을 따져 성토하는 것이었다.
제일 먼저 까마귀가 나섰다. 까마귀는 반포지효(反哺之孝)를 만들어 낸 장본인으로서 요즈음 인간들이 부모가 진지를 잡수셨는지, 처자가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고 산다 하니 어찌 까마귀 족속만 하리오. 우리를 보고 흉조라 하나 미리 위험을 알려 주는 참뜻을 알지 못함이라. 억울하다.
두 번째로 여우가 나섰다. 우리를 호가호위(虎假虎威)라 하나, 그것은 호랑이의 위엄을 빌려 위기를 극복해 가는 우리의 슬기요, 음란과 요망의 상징으로 우리를 말하나 여우는 분수를 지켜 타 짐승과는 통교하는 일이 없거늘 우리보다 더 문란한 인간들이 할 말인가.
세 번째로 개구리가 등단했다. 인간들은 우리를 일러 정와어해(井蛙語海)라 해서 깔보지만, 우리는 분수를 알고 지켜 주제넘지 않거늘, 인간들이야 말로 분수를 모르고 날뛰니 분수를 알아야 할 자는 바로 인간들이 아닌가.
네 번째로 벌이 등단했다. 인간들이 우리를 일러 구밀복검(口蜜腹劍)이라 욕하나, 입에 꿀은 양식일 뿐이요, 배에 칼은 정당방위용일 뿐이다. 우리는 한 임금만 섬기며, 군령이 분명하나 인간들은 배신이 난무하고 게으른자 많으니 자신의 직분에 충실한지 부끄러운 줄 알라 !
다섯 번째로 게가 등단했다. 우리를 일러 무장공자(無腸公子)라 하면 무례하다. 우리는 비록 옆으로 걸어도 앞으로만 가며, 제 구멍이 아니면 안 들어가거늘, 온갖 부정부패와 윤리를 모르는 인간들이여 올바른 창자가 있는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되느뇨.
여섯 번째는 파리였다. 우리를 간사한 소인(螢螢地極)이라고 하나, 우리는 동포애가 지극해 먹을 것을 보면 혼자 먹는 법이 없다. 하지만 인간들은 이익만 보면 골육상쟁도 마다하지 않으니, 파리를 쫓으려 하지 말고 너희들의 썩은 생각이나 쫓아 버려라 !
일곱 번째 호랑이가 등단했다. 우리를 빗대 가정맹어호(苛政猛於虎)라 하여 포악의 상징으로 일컬으나, 우리는 포악하되 때와 장소를 가리고 은혜를 갚는 의리가 있다. 하지만 인간들은 어떠한가. 부디 인간의 이름을 떼어 버릴지라 !
마지막으로 원앙새가 등단했다. 우리는 쌍거쌍래(雙去雙來)라 옛적 사냥꾼이 암 원앙새를 한 마리 잡았는데 일 년 전에 잡은 수컷의 머리를 날개 아래 지니고 다니다 잡히니 그 후로 사냥꾼이 다시는 원앙새를 잡지 않았다 한다. 오늘날 과연 인간들에게 부부간의 순정이 남아 있는가? 가족 간의 사랑이 건재하는가? 이제 인간의 이름을 떼어 버려야 할 것이다.
1908년 안국선의 소설 ‘금수회의록(禽獸會議錄)’에 나오는 장면이다. 만물의 영장이라 자처하는 인간이 짐승만도 못해서야 어찌 부끄럽지 아니 하랴 ! 불수반수 반수불수(不羞反羞 反羞不羞)할지니(부끄러움을 모르면 부끄러움으로 돌아가라, 부끄러움으로 돌아가면 부끄럽지 않게 되느니) 인간들이여 ! 우리의 이름을 아름답게 찾고 지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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