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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는 도깨비와의 싸움

온달 (Full Moon) 2018. 6. 16. 15:08




시라는 도깨비와의 싸움

                                                                              이근배 시인

 

  

붓농사라고 했다. 우리의 선인들은 책을 읽고 글을 짓는 일을 농부가 씨뿌리고 거두는 일에 빗대어 필경(筆耕)이라고 했다. 내가 농사일을 한 40년쯤 했으면 하늘의 뜻과 땅의 숨결을 읽을 줄 알고, 이제쯤 일손을 놓고 들어앉아도 논밭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어림짐작을 할 법한데 나는 아직도 붓을 잡는 법도 서툴다. 머릿속에 갇힌 시들을 꺼내보려고 막상 원고지를 펴놓고 앉으면 앞이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온 천지를 휩쓸고 다니는 시라는 도깨비는 어디에 숨어서 좀처럼 얼굴을 내보이지 않는 걸까?

 

대가 끊겼다는 고려청자는 그릇의 모양을 빚기에 비결이 있는 것이 아니고 유약을 조제하는 데에 비방이 들어 있다. 어떤 돌가루를 어떤 물질들과 혼합해서 초벌구이의 흙 위에 발라야 1천3백도의 불가마에서 익어서 그 불가사의한 청자 빛을 내는지가 열쇠이다. 그렇다면 청자 한 점을 성공시키는 유약을 개발한 것으로 천 점 만 점을 구워낼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시는 한 편을 쓴 것으로 또 다른 한 편을 써낼 수가 없다. 한 편의 시를 만들어냈던 틀과 공법, 흙과 유약은 폐기처분 시켜야 한다. 새로 시를 쓰기 위해서는 다시 흙을 골라야 하고 다른 빛깔의 유약을 배합해야 한다. 그러니 막막할밖에 없다.

 

나는 시의 봇물이 터져 수도꼭지를 틀어놓은 듯 시를 줄줄 쏟아내는 시인들이 부럽고 한 해에 시집을 한 권씩 펴내는 시인들이 높이 올려다 보인다. 타고난 시적 재능과 넘치는 글감이 있어서 많이 써내고 또 활자화도 시키는 것이겠으나 나는 그런 것을 갖지 못했다. 머리를 짜고 뼈를 뒤틀어 시랍시고 몇 자를 옮겨 적어도 돌아보면 이게 무슨 글인가 싶어 다시 거둬들이고 만다.

 

그래저래 이리 궁글고 저리 궁글다 여러 해를 넘겨 뒤늦게 시집『사람들이 새가 되고 싶은 까닭을 안다』원고를 낭떠러지를 뛰어내리는 심정으로 용기를 내어 출판사에 넘겼다. 그동안 선배, 동료, 후배들에게 시집은 왜 안내느냐? 고 사랑어린 채근을 자주 받아 왔었다. 그 가운데도 첫 시집『노래여 노래여』를 억지를 써서 고맙게도 출판해 준 김종해 형의 극성은 남달랐다. 몇 군데 출판사와의 약속을 뿌리치고 동무 따라 강남행을 한 것이다.

 

주요 일간지들이 다투어 큰 지면을 할애해 주었고 문학지들도 서평을 실어 격려해 주었다. 그러나 나는 앞이 캄캄하다. 겸양도 아니고 빼는 소리도 아니다. 40년 넘는 붓농사가 고작 이것밖에 못되느냐! 는 질책이 내 머리의 뒷골에 채인다. 나도 남들처럼 내년이나 후년쯤 새 시집을 들고 나와서 이만큼은 컸노라고 소리를 내지르고 싶은데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는 것이다.

 

나는 여기쯤서 내 삶을 송두리째, 그리고 내 글 읽기와 붓농사의 모든 것을 점검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어디서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내가 굽는 청자의 빛깔이 왜 어둡고 칙칙한지? 유약의 배합이 왜 틀렸는지? 처음으로 되돌아가서 곰곰이 따져봐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참으로 엉터리이지만 시 쓰기에서 만은 정직하려고 애써 왔다. 세상에 정직하지 않은 시가 있을까마는 시라는 도깨비는 때로 정직을 가장하기도 하고 정직을 짓밟기도 하면서 여러 얼굴로 둔갑을 하기 때문에 내가 아무리 정직하려 해도 시가 말을 듣지 않을 때가 있고 정직했다하더라도 사람들에게 먹혀들지 않거나 정직하다는 것이 오히려 손해를 입을 때도 있게 마련이다.

 

한 편의 시가 생산되는 과정을 청자나 백자를 굽는 것에 비유하면 먼저 좋은 흙(글감)을 찾아야 하고, 흙을 물에 걸러서 곱게 앙금으로 가라앉혀야 하고, 진흙을 물레로 빚어 초벌구이를 해야 하고, 그 위에 유약을 발라 불가마에 익혀야 하는데 나는 흙(글감)을 찾는 데서부터 매우 눈이 어둡다.

 

다른 도공들은 금수강산을 다 헤집고 다니며 흙을 파오는데 나는 고작 나를 낳아주고 길러준 고향의 텃밭이나 뒷동산의 흙을 삽질한다. 내 고향의 흙을 파내기에도 힘이 부치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서 나라 찾기에 나선 아버지 덕분에 나는 할아버지 품속에서 배우고 자랐다. 한학을 하시는 할아버지는 우리 집의 가장일 뿐 아니라 당진군에서도 웃어른이었다.

 

할아버지의 사랑방 문갑 위에 놓인 벼루상자에는 붓과 먹과 벼루, 그리고 산수문백자연적이 있고 벼루에는 먹물이 항상 고여 있었다. 헤르만 헤세는 네 살 때 할아버지 서고에 들어가 책을 만진 데에서부터 글쓰기가 시작되었다지만 나는 할아버지의 붓을 쥐는 데에서부터 나도 모르고 시를 쓰는 일로 들어서게 된 것이 아닌가도 싶다.

 

광복 다음해 송산국민학교에 입학했으니 온전한 한글세대이다. 내 나라의 말과 글은 나의 살과 뼈로 나를 키웠고 나는 모국어의 그 휘황찬란한 대지에 서툰 발걸음을 떼고 있었다. 이데올로기의 충돌은 급기야 동족끼리 죽이고 죽는 전쟁을 불러들였고 그 시대의 태풍에 휘말려 나는 한 장 길 위에 떨어진 낙엽처럼 뒹굴어야 했다.

 

저 참혹한 전쟁의 회오리가 어찌 내게만 시련과 고통을 주었을까마는 그로 비롯된 아버지의 미귀가, 어머니의 빼앗긴 세월이 내가 구워야할 청자항아리나 백자꽃병의 태토가 되는 것을 나는 막을 수 없다. 지금까지 내가 써온 시들은 한 편 한 편이 내 삶의 뿌리와 꽃과 잎을 송두리째 태워서 재를 만든 것이다. 도자기의 빛깔이 검든 희든 푸르든 붉든 내 살과 뼈의 재를 유약으로 바른 것이다.

 

그러면 나는 죽을 때까지 이 짓만을 하고 있어야 하는가? 아닐 것이다. 이 땅의 역사, 문화, 정신의 광맥은 아직도 누구의 삽날에도 끄떡없는 채 깊고 멀게 뻗어있다. 천년만년 캐고 파내도 끝이 없는 이 광맥을 찾아 어슬렁거릴 때도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와 함께 이 시대를 경작하는 시인들에게도 나는 한 마디하고 싶다.

 

과연 우리는 역사 앞에 민족 앞에 진정코 새벽을 깨치는 화두를 내놓고 있는가. 아니 인류 앞에 이것이 한국의 모국어, 한국의 문자로 일으켜 세운 시의 한 패러다임임을 천명할 수는 없는가? 우리의 선인들이 개간해 온 시의 텃밭에 풍성한 수확을 거둘 수는 없는가? 이제는 나를 뛰어넘어야 한다. 시의 경계는 없다. 지난 한 세기의 담금질만 해도 한국시가 세계를 도취시킬 발효는 충분히 숙성되어 있다.

 

사람은 누구나 들짐승같이 목숨을 이어가고 생식하는 외에 정신적 기쁨을 얻는 “무엇” 하나를 갖고 있다. 나는 젊은 날부터 벼루라는 먹을 가는 도구에 빨려 들어가 하늘의 별을 찾듯 그것을 찾고 헤맨다. 이번 시집에 “벼루읽기”라는 부제를 붙인 몇 편의 시들은 거기서 얻은 것이다.

 

꽃을 그리는 화가에게 꽃이 사람이고 집이고 우주일 것이다. 나는 벼루 속에 우주만물이 들어있는 것을 본다. 벼루로 문방생활을 해온 나라는 한, 중, 일 세 나라인데 어찌된 셈인지 중국의 벼루에 대한 연구와 문헌은 산같이 쌓여도 아직 우리나라 벼루에 대한 연구나 저술은 나오지 않고 있다. 그러나 내 어린 눈으로도 우리나라의 옛 벼루, 14~15세기부터 압록강부근의 위원(渭原)땅에서 캐낸 위원화초석(渭原花艸石)에 투각으로 조각을 한 일월연(日月硯)은 중국의 벼루예술이 따를 수 없는 조각예술의 극치를 이루고 있음을 확연히 알 수 있다.

 

무릇 인류의 예술은 옛것을 캐고 그 뿌리에서 올라오는 기운을 열어 새로운 창조의 세계를 열어가는 것이다. 몇 백 년 묵은 돌덩이에서 무슨 시가 나올까보냐고 묻겠지만, 큰선비들의 안상에서 시문을 경작하던 그 텃밭에 묻힌 별보다 많은 생각들을 나는 하나씩 훔치고 싶은 것이다.

 

아무튼 시라는 도깨비와의 싸움에 끼어든 지 오래되었지만 나는 제대로 힘 한번 쓰지 못하고 오늘토록 무너져왔다. 오직 한 편의 시라도 내 화두요 담론이라고 스스로 입 밖에 낼 수 있을 때까지 나는 승리는 없고 패배만 있는 이 싸움을 해나갈 것이다. 벼루에 먹을 갈 듯 혼신의 힘으로 나를 갈아 엎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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