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6 斷想
ⅰ
내게 양력 새해는 치레용이었다. 동양인들 대다수의 머리속에는 음력설을 새해로 올리며 경자년 초하루는 아직 한 달이나 남았다고 말한다. 이러한 풍습은 그 뿌리가 깊어서 양력화가 어려웠던지 ‘구정’이라 부르다가 그 후 ‘민속의 날’로 탈바꿈하였으며 마지막에는 정부에서 손을 들고 항복하였다. 지금은 ‘설날’은 당연히 음력설로 알고 있으니 그동안의 관가의 노력이 허사였던 것이다.
지금 신정은 나에게 치레용이 아니라 實用이다. 물론 신정을 쇠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집안의 종손도 아니어서 명절제사, 기제사의 책임에서 벗어나 있어서 다른 이의 양해를 구할 필요가 없다. 나 홀로 양력설을 쇠기로 작정하는 것이 가능했었다. 그리 오래지 않은 몇 해 전부터다. 명절은 신정 하나 만으로 충분해 졌고, 가족의 생일까지 모두 음력을 태양력 Calender로 바꾸었다. 딱 하나 추석이란 명절이 마음에 걸리지만 음력을 몰라 잊어 버리는 경우는 없을 테니까. 이 날만큼은 남 하는 대로 거름지고 장에 가듯 남 따라가고 있다.
ⅱ
이번 겨울은 시애틀에서 나고 있다. 이곳 날씨는 특이해서 매일 아침 가랑비가 내린다. 이들의 말을 빌리면 10월에 비가 시작 되서 다음해 5월까지 계속된다고 한다. 아침에 자고 나면 꼭 비가 와 있다. 많지도 않고 적지도 않고 길바닥이나 적실정도다. 비다운 비는 2번 정도 경험했지만 나머지는 모두 실비다. 신기한 것은 아무도 우산을 쓰거나 레인코트를 입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냥 상의에 후드가 붙어있는 추리닝 정도가 보통이다. 오래 있어보니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시대 때도 없으니 매일 우산을 손에 달고 다녀야 할 처지라면 차라리 약간 젖은 옷쯤이야 입은 체 자기 체온으로 말리면 되지 않겠는가.
ⅲ
어제 이곳 제야 행사는 기상 때문에 불꽃놀이 행사가 취소되었다. 이정도면 싶었지만 밤하늘을 수놓을 화려함을 기대하는 시민들의 눈높이를 맞출 수 없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개봉되어 제조된 화학품은 내년까지 보관할 수 없을테니 모두 버려야 할 처지겠지만 미완성의 아름다움을 공중에 펼쳐 보이기보다는 차라리 행사를 취소하는 쪽을 택하지 않았을까? 예산집행으로 되물릴 수 없는 일이지만 행사의 질을 생각하는 시 당국자의 판단이 돋보인다. 일기가 고르지 못한 곳이니 이런 예산 낭비가 어디 이뿐이겠는가. 시애틀은 Boeing, Amazon, Google, StarBox, Costco등 유명한 대 기업이 많다. 혹자는 기후 때문이라는 설명을 했다. 늘 흐린 날이니 밖에서 보다는 실내 회의가 많을 것이고 이러한 근무 분위기로 토의 문화가 정착되어 의견규합(Brain Storming)이 잘 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이도 있다. 흥행에 성공한 영화 한 편으로 이 도시가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이란 별호가 붙기도 했다. 요즈음 미식축구가 시즌이라 시애틀 팀 바다독수리SeaHawk 때문에 밤잠을 설치고 있다.
ⅳ
새해 결심은 어떤 것인지를 미국인에게 물어보았다. 등산이나 여행 등이 아닐까 싶어서다. 그의 답은 이외였다. ‘지금 보다 나은 자신이 되고 싶다’는 것이었다. 동양인이 철학적이라면 서양인은 실리적이라는 평을 많이 듣는다. 그가 말한 ‘오늘 보다 나은 내일’은 내가 덕담으로 자주 써오던 논설 메뉴다. 생각지도 않았던 그의 새해 결심에 나는 크게 놀라고 말았다. ‘日新又日新’ 대학(大學)에 나오는 말이다. 여기에 탕 임금의 이야기가 나온다. 湯之盤銘曰 苟日新 日日新 又日新(탕지반명왈 구일신 일 일신 우일신)이란 탕 임금이 세숫대야에 이 문장을 새겨놓고 아침마다 읊었다고 한다. 한 서양인의 새해 결심에 내가 놀랐다는 건 어디까지나 글 한 줄 더 읽었다고 자만하는 나의 거드름에서 나온 빈정거림 일지도 모른다. 탕왕 근처에도 가지 못하면서도 매 해마다 정초가 되면 같은 말을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ⅴ
아침 산책길에 노인네를 만나 인사를 건넸다. 'Hi' 아니면 ‘Good Morning' 정도가 평일의 인사법인데 날이 날인만큼 ’Happy New Year"라고 오른 쪽 손을 치켜들었다. 아! 얼마나 반가와 하는지, 주름투성이의 노인의 얼굴에 함박꽃이 피었다. 기대하지도 않았던 방문객에게 인사 선수를 빼앗기어 송구했을지도 모르고 아니면 어른을 어른답게 대접할 줄 아는 양반을 오랜만에 본다는 생경스러움 때문이었을까? 노인은 많은 말씀을 하셨지만 말씀이 빨랐고 설상가상으로 내 귀가 영어에 덜 튀여서 모두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ⅵ
아내의 생일은 오늘 1월 1일이다. 아내의 주장대로라면 음력 정월 초사흘이던 것을 우리家庭維新(?) 때에 주민등록증에 적혀있는 날짜를 기준으로 모두 양력화 하는 과정에서 새해 신정으로 채택되었다. 특히 외국에는 달력에 음력을 표기하지 않으니, 때마다 날짜를 자식들에게 미리 통보 해 주어야 했으니 그야말로 엎드려 절 받기가 아니었던가. 지금은 서로가 아주 편해졌다. 주민등록 번호 앞자리 여섯을 알고 있는 한 부모 생일을 잊었다는 구차한 변명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생일은 일 년 중 어느 날이든 하루만이 나의 날이다. 어차피 지나간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데 정확한 그때 그날은 존재하지 않는다. 언감생심 엇비슷한 날에 기억해 주는 것만 해도 감지덕지한 일이다. 크리스마스와 겸한 아내의 생일 선물은 올해는 한 보따리다. 삼성 갤럭시노트, 좌우로 늘어진 직사각 케이크, 그 위에 Happy Birthday 란 글자가 한 자씩 꽂혀 있다. 장미가 없어 대신 사 왔다는 노랑, 빨강의 거베라gerbera 꽃다발은 그 꽃말이 ‘신비’라고 한다. 거베라의 신비는 붉은 장미의 ‘정열’에 비할 바가 아니다. 식구가 대단히 만족해 하니 올 한 해도 평화로울 것이다. 아내의 기쁨은 새해 萬福의 출발이며 한 가득 滿福의 시작이다.
온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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