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 최흥효(崔興孝)는 유명한 서예가였다. 그는 늘 중국의 서예가 왕희지(王羲之)의 글씨를 보고 수도 없이 연습을 하곤 하였다. 그가 과거 시험장에 가서 답안지를 쓰는데, 우연히 한 글자가 왕희지의 글씨와 꼭 같게 써졌다. 평소에는 아무리 연습해도 되지 않던 글씨였는데, 똑같이 써지자 그는 매우 기뻤다. 그래서 하루 종일 그 글씨만 바라보다가 차마 아까워 시험 답안지를 제출하지 못하고 그대로 품에 넣어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아마도 글씨에 반해서 자신이 과거를 보고 있다는 것 조차도 깜박했던 모양이다. 후일 문과에 급제를 했다는 기록이 있으니 붓 글씨에만 미쳐 출세길이 막힌 뚱단지 같은 선비의 일화가 아니다. 그는 안평대군과 쌍벽을 이루었던 당대 최고의 서예가가 되었다.다. 미쳐야(狂) 이룬다(及)는 사자성어 불광불급(不狂不及)을 말할 때 자주 회자되는 이야기다.
최흥효는 1411년(태종 11) 문과에 급제한 인물이다. 한 이후 1414년 승문원 부교리로 있을 때 명(明)에 보내는 자문(咨文)을 잘못 작성하여 파직당하였다. 이후 관직에 복귀하여 인녕부 판관(仁寧府判官)을 지냈으나 1420년(세종 2) 상주문(上奏文)에 날짜를 넣지 않은 것이 또 문제가 되어 익산에 귀양 갔다가 그 해 말에 복직되었다. 이후 사간원 우헌납, 병조 정랑을 거쳐 예문관 직제학을 끝으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최흥효는 대외 문서를 작성하는 일을 주로 담당하는 한편, 필사와 관련된 국가의 업무도 병행하였다. 이조 낭청으로 있을 때에는 국왕의 관리 임명 문서인 고신(告身)을 필사하기도 하였으며, 왕실 발원 불사의 사경(寫經) 작업에도 여러 차례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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