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 모음/운문

예금통장

온달 (Full Moon) 2020. 9. 14. 14:55

 

예금통장

                     조향미/ 시인, 교사

 

잔고가 얼마 안 남았다

월금날은 한참 남았다

들여다보니 쌀통 김치 통 꽤 남았다

냉장고에 시든 고추 파 두어 뿌리

평소에 살피지도 않았던

뒤 베란다 감자 양파 몇 알도 쓸 만하다

옷장엔 묵었으나 옷들은 많고

책장엔 읽지 못한 책들도 많다

모든 것은 풍요하고 너끈하다

조금 비어서 기분 좋은 위(胃)처럼

잡풀을 쳐낸 생의 앞마당은 여백이 널찍하고

식탁은 신선한 허기(虛飢)로 풍성하다

예금통장이 빈 도시락처럼 달그락 거릴 때면

푸석 푸석 곰팡이 나는 녹에 파묻혀 있던

낡고 헌 사물들의 말간 얼굴들이 보인다

잘 닦으면 은은히 청동 빛이 난다

또한 뿌듯한 일

며칠 지나도 헐렁한 쓰레기통

죄를 덜 지었다는 증거다

가을볕에 잘 마른 무명수건 처럼

제법 깔깔해진 마음으로

물기 젖은 누구의 얼굴을 닦아주고도 싶다

 

소금항아리 2007/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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