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금통장
조향미/ 시인, 교사
잔고가 얼마 안 남았다
월금날은 한참 남았다
들여다보니 쌀통 김치 통 꽤 남았다
냉장고에 시든 고추 파 두어 뿌리
평소에 살피지도 않았던
뒤 베란다 감자 양파 몇 알도 쓸 만하다
옷장엔 묵었으나 옷들은 많고
책장엔 읽지 못한 책들도 많다
모든 것은 풍요하고 너끈하다
조금 비어서 기분 좋은 위(胃)처럼
잡풀을 쳐낸 생의 앞마당은 여백이 널찍하고
식탁은 신선한 허기(虛飢)로 풍성하다
예금통장이 빈 도시락처럼 달그락 거릴 때면
푸석 푸석 곰팡이 나는 녹에 파묻혀 있던
낡고 헌 사물들의 말간 얼굴들이 보인다
잘 닦으면 은은히 청동 빛이 난다
또한 뿌듯한 일
며칠 지나도 헐렁한 쓰레기통
죄를 덜 지었다는 증거다
가을볕에 잘 마른 무명수건 처럼
제법 깔깔해진 마음으로
물기 젖은 누구의 얼굴을 닦아주고도 싶다
소금항아리 2007/0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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