著書/돼지(2007)

온달 (Full Moon) 2015. 4. 11. 16:41

길 / 석현수 

 

 

 

아버진 소달구지로 한평생을 사셨다.

새벽에 나무 짐 싣고 집을 나서시면 성내〔大邱〕에서 아침을 맞고

손쉬운 기와공장에 나뭇짐 흥정이라도 되는 날이라야

점심때 간신히 돌아올 수 있었다.

가는 길 다섯 시간 오는 길 다섯 시간,

하루에 열 시간을 길에서 보내는 노상(路上)인생을 사신 것이다.

눈 오나 비 오나 바퀴를 굴러야 사는 생활

길에서 이력이 나신 분이셨다.

밤길 다섯 시간은 무서움으로, 낮길 다섯 시간은 퍼붓는 졸음으로

생각해 보 매일 매일이 지금으로 치면 극기 훈련 내지는

철인 삼종 경기를 하며 사셨던 것이다.

가시는 길이 오십리 이니,

하루에 걸으시는 길은 꼬박 백 리인 셈이다.

밤길은 그리 호락호락 하지 않다.

요즈음은 밤에 차량 전조등이라도 비치지만

50년 전인 1960년대의 상황이란 해만 지면 암흑천지였다.

전기불이란 도회지에서나 구경 할 일이며

우리가 사는 시골에는 아예 생각도 못했고,

산 짐승소리와 부엉이 소리를 들으며 밤길 나들이를 한다는 것은

여간한 용기가 아니면 어려웠던 것이다.

가끔은 여름철 늦게까지 놀다가 돌아오는 이웃 나들이 때는

건전지를 이용한 손전등은 사치였고,

기껏 호롱불 등(燈)을 들거나 관솔에 불을 붙이는 정도였으니,

밤은 언제나 으스스하고, 공포 속 이으며,

산 짐승 울음소리는 밤의 정취를 앗아가는

전율(戰慄)에 가까운 것이었다. 

 

 

 

 

밤 길 

 

 

상여(喪輿)집 지나면서 귀신불 보고  

해마다 여름날 처녀 총각 빠져죽던 기세못 

몽당귀신 울분처럼 쩡 쩡 쩡 얼음 갈라지는 소리

불여우 암수 새끼

마중하는 개울 다리 지나면

개 짖는 소리, 늑대소리 섞일 때 쯤

주뼛 주뼛 머리마다 하얀 서리 내리고

길모퉁이 돌고 돌아

화톳불하나

추위 이기고

무서움도 태우고

성업(盛業) 중인 나무장수 재미가 솔솔 해

뉘어둔 자식들 커가는 재미가 솔솔 해

개근(皆勤)으로 나서던 밤길

눈 오는 날에도 달구지는 떠나고

어머니의 마음은 문고리에 매달려

동트기를 기다리는 기도 같은 생활

아뿔싸 세상에!

동구 밖 눈길 위 선연(鮮然)한

핏자국 하나둘 뚝뚝

피 흘리며 짐을 끌었던 우리 소(牛)

그리고 아버지

숙명의 우인동체(牛人同體) 

 

 

밤길에 비해 낮 길이 수월하긴 해도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다.

퍼붓는 졸음으로 소도 사람도 지쳐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소의 상태를 보아가며 달구지에 앉아서 오시기도 했다.

소도 달구지가 가벼워졌기 때문에 수월해 지긴 했으나

졸음이 오긴 마찬가지리라.

당시는 신작로에만 아스팔트로 포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좁은 도로에 달리는 버스나 화물차의 유세란 대단했다.

길에서 화물차라도 한번 얻어 타려면 기사 분들과의 대화가 과거(科擧)만큼이나 어려웠던 시절이다.

과속이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던 시절이라

소달구지가 평화롭게 오고 가도록 내 벼려둘 정도로

차량들이 고분고분하지는 않았다.

자칫하면 농수로에 뒹굴거나

순간순간이 위험천만의 상황일 될 수도 있었다.

맑은 정신에도 비껴가기가 어려운데,

잠든 주인을 모시고 번잡한 교통을 피해 소가 알아서 살펴갔으니  

불안한 귀가 길 사고 없이 평생을 보낼 수 있었음은  

모두 하느님이 보우 하셨음이리라.

겨울철이야 추우면 걷는다지만

여름 뙤약볕은 대책 없이 머리에 쉰내가 나도록

노출되어야 하는 상황이었다.

소는 우리의 재산 목록 1호였으며 소가 아픈 날은

온 식구가 비상이 걸렸다.

그런 날은 특별히 쇠죽에 콩이 많이 들어갔으며

아이들은 소의 영양식으로 뽕잎을 따러 들녘을 나갔다.

소는 가족의 가장 중요한 구성원이었다.  

 

 

 

낮길 

 

 

밤잠은 누가 모두 앗아 가기에

소도 사람도

걸으면서 조는 가?

빈 달구지에 걸터앉으면

운전(運轉) 임무는

소 쪽으로 넘어가고

아버지는 출렁이며 또 흔들리며

꿀잠을 주무시다.

한(大)길 사람들

잠 깨워 주고 조심하라지만

듣는 척

못들은 척

잠이 드셨다.

보릿짚 농립(農笠)모자 턱 끈 받치시고

목 떨 구고 한밤중인 주인장

느릿느릿 걸어도 걸음은 황소걸음

기사 분들 불 칼 같은 성화도 아랑곳하지 않고

주숙야보(晝宿夜步)

소도 졸고 사람도 졸고

그러나 항상 길은 꿈속에 열려있어

하느님은 아버지와 우리 소를 보호하시다

천운의 우인동체(牛人同體)!

소와 나무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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