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 / 석현수
“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부엌 이다.”
『요시모토 바나나』의 단편 ‘키친’의 시작이다.
우리는 각자가 나름대로
가장 좋아하는 장소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더러는 언제든지 책이 손쉬운
자기 자신의 서재 일 수도 있고,
아니면 조용한 음악을 위해 음향기기가 위치한 거실일수도,
혹은 외진 이층 방 한곳에 자기만의 아지트를
이야기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곳이면 아무에게도 방해 받기 싫어질 때
슬그머니 침잠해 들어갈 수 있는 안식처(shelter)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것이 어디에 있든, 어떤 모양이든, 부엌이기만 하면 좋다.”
라고 젊은 여 주인공 ‘미카게’는 말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생뚱맞게도 ‘화장실’이다.
다소 품위가 없어〔貧〕보이기도 하고,
선뜻 이곳이다 하고 내 세우기가 민망은 하지만,
화장실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이다.
편안한 안식처이기에,
이곳에서 생각의 실타래도 풀기도 하며,
바쁜 일상으로부터 잠깐 잠깐 벗어날 수 있는,
이런 자그마한 공간으로 이만 한 데가 어디 있겠는가?
누구에게도 간섭을 받지 않으면서 짧은 시간을 보장 받는 곳,
들어가 내가 점하고 있는 때
그 곳 시간과 공간은 온전히 내 것이 되기 때문이다.
고급스럽거나 사교적인 대화에
내세울 장소가 아니라서 다소 유감스럽긴 하다.
그러나 뒷간으로 이름 하던 변소(便所),
즉 옆에 붙은 곳(Annex)로 치부(恥部)하던
옛날의 화장실의 전력(前歷)과는 전혀 다르지 않는가?
지금은 주거 공간의 중심이 되어 방속까지 들여 놓여 있어
가옥의 변방(邊方)이 아니라 중심으로 옮겨져 있다.
최근의 문화생활 덕분이 아닐까 생각한다.
예전 사람들은 화장실을 집의 구석진 곳에 위치시켜,
뒷간이라고 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 내가 좋아 하는 화장실은
생활의 중심부로 이동해 버린 화장실을
이야기 하는 것이니 기피성(忌避性) 단어는 아닐 성 싶다.
화장실은 나에게 생각의 장소이다.
하루의 중요한 일은
대게 이곳에서 제일 먼저 구상한다.
일어나면 제일 먼저 들르는 곳이 이곳이니,
첫 생각의 실마리는 여기서 찾을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나는 화장실에서 그려지지 않는 그림〔構想〕은
그날 구상하지 않는다.
내가 내 자신을 살 펴 볼 수 있는 곳도 이곳이다.
과대 포장된 나의 겉모양과,
텅 빈 머릿속을 들여다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나의 철학을 이곳에서 대면하게 된다.
가장 볼품없는 자세, 바닥의 모습,
형이하학적(形而下學的)으로는
암수에서 한 치도 다르지 않을 내 모습 보기로,
스스로 겸손을 택해야할 이유를 이곳에서 찾는다.
나의 가벼운 독서 또한 화장실에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화장실에는
항상 이리저리 생활 잡지들로 널브러져 있다.
주된 읽을거리로는 종교관련 잡지이다.
평시에는 손이 미치지 않는 것들로써
딱히 독서라 하긴 좀 뭣하고,
그러면서도 빼 놓을 수 없는 작은 것 들이다.
화장실에는 암모니아 냄새 끼(氣)가 있어
머리가 상큼해지니 자연적으로
머리에 쏙쏙 들어온다는 위로를 해 가면서
희귀한 마음의 비타민을 이곳에서 섭취하고 있다.
또한 화장실은 나의 좋은 휴식의 장소이다.
영어의 Rest Room이
이런 뜻에서 생겨나지 않았나 생각도 해 본다.
딱히 쉴 공간이 없어서가 아니라,
누가 말을 걸어오는 것도 싫어지는 때는
화장실에 들어가 앉는다.
선사시대(先史時代)에 솟대가 있어
죄인들도 그곳에 잠입하면 보호를 받던 것처럼,
화장실에 들어가 문을 잠그고 나면
모든 것으로부터 나는 도피할 수 있다.
작은 공간 속, 짧은 여유를 되찾는 것이다.
직장인들이라면 분주하게 돌아가는
일자리에서 멀리 빠져 나오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사치스런 휴게를 생각하지만 않는다면야,
번개 휴식(休息)을 위해
화장실 문을 잠가 봄도 지혜롭지 않을까?
변기에 걸터앉아 피곤한 육신을 위해
잠시나마 숨을 돌리며 눈을 감아 봄은
찌들은 직장 생활 중에
한 모금 감로수가 되고도 남을 것이다.
대부분의 공학도가 그러했듯이
나 또한 평범한 한 소시민으로의 생활을 꿈꾸었다.
아파트로 치면 자연적으로
내게는 스무 남의 평수가 알맞다고 생각했다.
사는 공간이 넓으면 넓은 만큼 가장(家長)으로써
그 공간을 남들처럼 채워야 한다는 것도 그렇거니와,
부지런하지 못한 성품에
해야 할 청소면적도 넓어지고, 게다가 관리비,
난방비도 점유 평수에 비례해서 비용을 물어야 하니,
당연히 스무 평 미만의 아파트가 나에겐 제격이리라.
그러나 그렇게 못하는 한 가지 이유가 있다.
화장실이다.
화장실이 하나인 집 구조로는
내 괴팍한 화장실 습관을 부지하기가 어렵다.
자신의 전용 화장실 하나를 할당받기 위해
나는 능력 밖의 평수로 분에 넘치는 사치를 부려야만 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곳은 화장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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