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남자
석현수
생일이 없어져 버렸다. 누군가가 챙겨주던 생일, 직장에서 동료가, 친구가, 그리고 가정에서 극진히 아내가 챙겨주던 생일이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이제 나의 생일은 누구도 생각 하지 않는 극히 사사로운 혼자만의 일에 불과해 지고 말았다. 식구에게서 마저도 대수가 되지 못하는 그렇고 그런 날이 되다니 갑자기 생일 없는 소년이 된 것일까? 꽃바구니도 케이크도 없는 생일날 아침을 맞이하고 보니 세상사는 모양이 허접해 보이기 그지없다.
동서남북으로 정신없이 지나온 가장의 공과는 잊어 버려도 좋다만 한 살짜리 돌잔치도 해 주는 세상에 환갑을 넘긴 가장의 생일을 이렇게 보내게 하다니 앞으로 생일은 얼마나 더 잘 챙겨 줄 거라고 이 꼴이냐 싶었다. 모두 고만고만하게 애기를 딸리고 저마다 남편 뒤치다꺼리를 하고 있는 마당에 애비 생일을 기억해 달라는 건 무리가 아닐까 싶긴 했다. 출가한 셋 딸아이는 아무도 아버지의 생일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자기들 끼리 잘 살면 그만이지 하는 생각이 앞섰는지 아니면 혹시 날자가 훨씬 지나 애비에게 생일 축하한다는 볼멘소리라도 할 까봐 일부러 아침 일찍 먼저 전화를 내었다. 그러고 보니 자식에게 생일을 보고를 했다고 하는 쪽이 더 맞겠다.
아침부터 어른이 애들처럼 웬 생일 타령이나 하느냐고 아내는 시큰둥하니 핀잔을 주고 있다. 아내도 이해 못하는 이상한 남편이 되어버린다. 챙겨주던 밥이 찾아 먹는 밥이 되고, 주던 월급이 타는 용돈으로 바뀌고, 가자고 끌던 내가 오히려 따라 오라는 아내의 강요로 서로의 위치가 바뀌었으니 상황이 달라지면 이런 정도는 대수롭지 않게 여겨야 하는 것일까? 남자란 지금까지 밖에 나가 자유롭게 나돌아 다니며 호사를 누리던 사람이었으니 좋은 것 다해 본 주제에 무슨 큰 소리 칠일 있냐는 것인가? 예전처럼 집안 어른 행세나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고 벼른 사람 같다. 늙어지면 공항에서 황혼이혼 당하는 일본 남편들 이야기가 남의 예기가 아니니 주의 하라는 식의 엄포를 놓는 건가 아님 실제 상황인가?
가까운 재래시장 꽃집에 들러 나는 장미와 안개를 섞어 꽃바구니를 만들어 달라고 주문했다. 곧 바로 아담한 꽃바구니 작업이 완료되었고 꽃집 아주머니는 리본을 달기위해 누가 어디로 보내는 건지를 물었다. 나는 그냥 ‘축 생신’으로 만 쓰고 보내는 사람은 필요 없다고 했다. 내가 내게로 보내는 꽃바구니, 꽃집 주인은 처음 보는 일이라고 하며 참 재미있는 아저씨네요 하였다. 재미있는 아저씨가 아니라 비참한 아저씨 같지 않아요 하자, 꽃집 주인은 혼자 사는 홀아비 인줄로만 알고 더 이상 말 붙이기를 꺼려하였다. 떡 가게에 들러 떡 몇 점을 주어 담았다. 제법 케이크 사이즈가 되도록 모양을 냈다. 나를 위한 나의 선물 준비가 모두 끝났다.
직장을 떠나 퇴직 생활로 접어든지 어언 10년이 지나간다. 그러나 그때의 승진, 자리 이동 등 경사스런 일이 있을 때마다 기억해 주고 축하해 주던 주위의 고마움들은 지금도 눈 감으면 꽃으로 화사하게 피어오를 듯하다. 반듯하게 잘난 것 하나 없었으면서도 참 많은 사람의 도움으로 지내고 있었구나 생각이 들었고 그들에게 빚진 것들을 갚지 못하고 일찍 자리를 떠 난 것 같아 아쉬움은 있어왔다. 특히나 오늘 같이 이런 고약한 상황에 부닥뜨리고 보니 그때의 꽃바구니가 내 인생에 있어 여간한 호사가 아니었나 생각이 들게도 한다.
이제 확실히 대수롭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가족마저도 대수롭게 여기지 않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 설령 내가 그런 입장이라 손치더라도 변명의 여지는 주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늘 강철 같아서 밖으로만 뛰어 다닐 수만은 없다는 것과 더 이상 울타리가 되지 못함을 아쉬워하는 것은 가장이 제 먼저 가지는 아쉬움이라는 것을. 남들처럼 잘 먹이고 잘 입히지 못했음도 가장의 발이 저린 부분이다. 꽃바구니가 얹히는 자리에 내가 사온 바구니를 놓았다. 꽃바구니에는 나를 기쁘게 했던 지난날의 따뜻한 정의 흔적은 없고 다만 돈을 건넨 장미향기만 따라와 있을 뿐이었다. 세상 창조를 마치고 이레 만에 안식일을 두어 마지막 날은 쉬도록 했다는 창조주께서, 남자도 나이 들면 쉰다는 부속 조항을 두지 않아 이런 혼란이 생겼을 것인지도 모르겠다.
'著書 > 선생출신(2010)'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선생 출신입니까 서문 (0) | 2015.04.15 |
---|---|
강한 남자 (0) | 2015.04.15 |
반지斑指 (0) | 2015.04.15 |
‘온달’을 필명으로 (0) | 2015.04.15 |
입장차이 (0) | 2015.04.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