著書/선생출신(2010)

강한 남자

온달 (Full Moon) 2015. 4. 15. 09:09

강한 남자 

 

석현수 

 

   

가족의 암묵적인 승인으로 간신히 4월 마라톤에 등록을 해 놓았었다. 암묵적이란 금지도 허락도 아닌 애매한 허락이다. 나이로 보나 체력으로 보나 지금쯤은 무리한 운동을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아내의 권고이지만 오래 동안 달리기에 맛을 드려온 터라 늘 이번만 뛰고 다시는 뛰지 않는 다는 단서조항을 붙여 허락을 받아낸다. 어렵사리 얻은 허락이었지만 마라톤 경기는 며칠 남지 않아 걱정이다. 지금쯤은 매일 뛰어 탄력을 붙여 주어야 한다. 훈련시의 땀이 실전에서 피를 절약하게 된다는 싸움 이론처럼 분명 연습한 만큼 당일 경기에서 덜 고생하게 되어있다.  

 

날씨는 여전히 춥고 아침부터 비가 뿌린다. 봄날엔 그 튼튼한 소가죽도 갈라진다는 말이 있긴 하지만 요즘 날씨란 운동하는 사람들 미쳐 버리기에 딱 좋을 만큼 비 아니면 진눈개비다. 하루 종일 창밖으로만 마음이 쏠리고 있었다. 벌써 이틀이나 뛰지를 못했는데 오늘 쯤은 한번 뛰어 줘야 하지 않을까하여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 해가 저물어 어둑할 무렵에야 가까스로 비가 멈춘다. 결심하면 곧 바로 행동에 옮겨 질 수 있도록 운동복은 아침부터 입고 있던 터라 신발만 졸라매면 그만이다. 나가자! 신이 내린 선물의 시간이 왔나보다. 

 

아, 나는 강한 남자다. 무려 두 시간을 뛰었다. 모처럼 땀을 흠뻑 흘리며 운동 갈증을 풀지 않았나 싶다. 모든 사람이 나를 쳐다보고 버스를 타고 가는 사람들은 차창 밖으로 부러 운 듯 내려다본다. 비록 팔팔한 젊은이의 건각은 아니지만 비가 그친 틈새를 이용해 이렇게 민첩하게 거리로 뛰쳐나와 달릴 수 있는 재치와 달리기에 도취한 내 모습이 얼마나 존경스런 스포츠맨의 모습 이런지. 시선이 내게로 올 때 마다 나는 어깨를 으스대며 폼을 잡았고 코를 벌름거리며 심호흡하였다. 폐부로 스미는 비 온 뒤의 밤공기는 얼마나 상큼하였는지. 암만생각해도 절로 강한 남자다 싶어 목에 힘을 주었다 풀었다 되풀이 했다. 

 

땀범벅이 되어 집에 돌아오니 집안이 온통 난리다. 강한 남자에 대한 추상같은 청문회가 시작되었다. 뉴스를 듣기나 했으며 하늘이라도 한번 쳐다보기라도 했냐는 것이다. 사실 나는 뜀박질에만 신경을 썼지 사방은 어두워져 있어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황사 이야기는 금시초문이었다. 가족의 말에 의하면 그날 저녁이 올 들어 가장 심한 황사가 몰아쳤다는 것이다. 아뿔싸, 그렇다면 사람들이 모두 나를 쳐다보았던 것은 부러운 시선이 아니라, 황사도 모르는 바보를 보고 힐끔거렸던 것이었나 보다. 한 밤중 시원하게 갈증을 풀었던 스님이 아침에 일어나서 보니 해골바가지에 고인 물을 마셨음을 알고 세상일이 모든 것이 마음먹기라고 하지 않았던가. 달리기에 정신이 팔려 오염된 황사공기도 그렇게 상큼하게 느끼며 거리에 나서다니, 내가 달리기해서 무슨 득도할 일이라도 있었더란 말인가?  

 

나는 아무렇게나 방사放飼해도 잘 살아남는 토종 염소의 경우처럼 스스로를 강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살았다. 고막이 찢어져야 소음인줄 알고 귀마개를 찾았고, 몇 개의 폐를 덤으로 달고 사는 사람처럼 먼지 나는 작업장에서도 갑갑하다는 이유 하나로 마스크를 벗어 던졌다. 늘 죽을 운은 따로 있다고 생각하고 하나 뿐인 생명을 생잡이로 인간 한계선에 들이대고 살았다. 올 들어 가장 지독하다는 황사 속에서 강한남자로의 착각은 자유였다. 보내온 시선이 연민의 정이었을 것이리라 생각했을 때는 잠자리에 들 무렵이었고 강한 남자가 순순히 고개 떨어뜨리고 항복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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