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직이라서
석현수
성직자도 사회의 한 구성원이니 사회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들도 선거를 통해 신성한 한 표로 권리를 주장해야 하고, 군대도 갔다 와야 합니다. 성직자이기 전에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 권리를 주장하고 의무를 다하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신선 같은 존재로 맑은 공기만 먹고 살 수 없을 테니 성직자인들 먹고 자고 입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런 면에서 본다면 성직자의 현실 참여는 속세의 우리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고 봅니다.
성직자들의 사회 현실 참여는 바람직한가,라는 물음 자체가 이상한 것입니다. 저로서는 당연히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성직자들은 존경받아야 하고, 품위가 유지되어야 하는 신분이기에 참여 방법에는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아무래도 이전투구를 하는 저잣거리의 사람들과는 달라야 할 테니까요. 성직자들은 나 홀로 한 마리 학으로 살아가는 분이 아니라 신자들과 더불어 살고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함부로 성직자의 체면이 손상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직자들을 욕되게 하거나 곤경에 몰아넣는 일은 몹쓸 일입니다. 종교를 가진이든 가지지 않은이든, 그리고 서로 종파가 다른 사람이든 간에 성직에 있는 사람을 존경해 드리는 일이 곧 자기 종교를 보호받는 일일 것입니다. 신자들은 성직자를 존경도 하지만 보호도 해야 합니다. 불교에서 삼보三寶가 무엇입니까? 불법승 가운데는 승僧의 위치는 불교 경전만큼이나 귀한 분들입니다. 신부, 목사님들은 청빈과 정결과 순명의 3대 서원을 통해 완성될 교회의 모습을 미리 증거해 주는 분들입니다. 하느님만큼이나 중요한 분들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성직자들의 현실 참여 방법이 너무 자연인 쪽에 더 기울어 가는 분들이 있어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성직자가 사회 운동가나 혁명가 같은 모습으로 대중 앞에 서면 신자들은 너무나 당황스러워 합니다. 현실 참여가 정도를 넘은 것이지요. 정부를 타도의 대상으로 삼으면 정부는 누구를 막론하고 공권력을 동원해 주의할 대상으로 삼습니다. 욕을 하면, 그 욕은 다시 욕한 사람들에게 되돌려 줍니다. 그러기에 신자들은 타도 대상이 되거나 욕먹는 자연인 쪽의 성직자들을 바라지 않습니다. 성직자가 성복聖服을 입은 채 매 맞거나 끌려가거나 하면 우리는 매우 혼란스럽습니다. 현실 참여의 정도가 도를 넘지 않아 세상 누구와도 마찰이 빚어지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복장이 이내 눈에 띄어 길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성직자분들을 볼 때면 차라리 우리가 신자가 아니었다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마음이 아프답니다. 이분들을 아끼고 보호하려는 많은 신자는 누구라도 성직자의 신분을 함부로 대하는 것을 그냥 보아 넘길 수가 없습니다. 우리 스님, 우리 신부님, 우리 목사님은 저희 영성생활에서 그 무엇보다 더 소중한 분들이어서 거룩한 모습을 머릿속에 두고 늘 존경하고 싶은 것이 신자들의 본능입니다.
스님, 분신자살 하지 마세요. 스님이라고 억한 감정이 없겠습니까만 스님의 분신자살은 너무 안타까워요. 갈 데까지 가버린 막장이 되더라도 끝까지 중생을 구제해야 할 직분이지 않으십니까. 스님을 잃은 신자들의 아픈 마음도 마음이거니와 적지 않은 이의 곱지 않은 시선이 더 마음을 아프게 한답니다. 불가에서는 작은 미물의 생명까지도 소중히 하여 벌레 하나도 죽이지 않는 것이 *사문沙門의 법이거늘 산 생명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붙일 만한 스님의 거룩한 분노를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이 헤아려 주려고 할는지 모르겠습니다.
신부님, 길거리에서 삭발하지 마세요. 너무 섬뜩하여 볼 수가 없네요. 신부님들이 아니어도 여당, 야당이 있고, 정부기관이나 사회 활동단체나 공무원들이 있거늘 하필이면 신부들이 나서야 할 이유를 잘 찾지 못합니다. 물론 어리석은 신자들이 세상 돌아가는 줄도 모를 것 같아 대신 나서서 희생하겠다는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으나, 굳이 신부님들이 거리로 나오실 만큼 나라가 기울거나 위태하지는 않다고 봅니다. 부디 끌려가거나 매 맞을 위험한 장소에 나 잡아가란 듯 계시지 않았으면 합니다. 분신자살이 스님께서 하실 일이 아니듯, 길거리는 신부님이 섣불리 뛰쳐나가도 될 안전한 곳이 아닙니다.
다투고 싸움질 하는 일은 일들은 세속 사람들의 전공이고, 이들의 상처를 쓰다듬고 다독여 주는 것은 성직자의 전공입니다. 양들이 백 번 싸우는 것보다는 성직자가 선두에 나서야겠다는 생각은 처음부터 잘못입니다. 성직자들은 싸움을 제대로 할 줄 아는 분들이 아닙니다. 그래서 서툰 싸움으로 훼손된 모습은 신자들에게 상처만 남겨 줄 뿐입니다.
성직자의 현실 참여는 당연합니다. 정책에 찬반을 나타낼 수도 있을 것이고, 불편스런 일에 항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지켜 주어야 할 선은 반드시 있다고 봅니다. 이럴 때마다 먼저 생각해 볼 것은, 나는 이 일을 자연인으로 하는 것인가 성직자로서 하려는 것인가를 분명히 판단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자연인으로서의 활동이면 성직자의 신분을 나타내는 어떤 표식도 절이나 교회에 벗어 걸어두고 거리로 나가거나 삭발을 하거나 하여 해당 종교와 신자들의 걱정을 조금이라도 덜어주는 센스가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다른 하나는 법회, 예배, 미사 시간에 법문, 설교, 강론을 통해 어느 한쪽에 편들기를 하지 말고, 성단을 내려온 후에 표현의 자유를 마음껏 누려야 합니다. 사사로운 가족 이야기를 성단에서 하지 않듯 세상 돌아가는 시끄러운 정치 이야기 또한 제단에서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제단 앞을 향해 우러러보고 있을 신자들을 먼저 배려해 주시는 섬세함이 또한 필요합니다. 천당 전문가요 극락 전문가인 분들이 아수라장 되어가는 비전공분야에 뛰어들어 섣불리 목숨을 걸고 현실 참여를 하신다면 양 떼도 흩어지고 존경도 잃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아 지레 걱정을 해 보았습니다.
* 사문 沙門 : 불교에서 출가하여 수도에 전념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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