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의 거리에 희망을 심다
석현수
펄 벅의 ‘대지’라는 영화를 기억한다. 먹구름으로 몰려와 삽시간에 들판을 삼켜 버리는 메뚜기 떼 재앙도 인상적이었지만 나는 그보다 복숭아꽃이 만개해 눈처럼 흩날리던 대지의 봄이 더 좋았다.
가난할 줄 밖에 몰랐던 주인공 ‘왕룽〔王龍〕’이 아내를 처음 대동하고 쑥스러워하며 오던 논길, 아내가 복숭아를 먹고 씨를 버리는 장면으로부터 영화는 시작된다. 전쟁의 혼란 속에서 우연히 아내가 보물 주머니를 줍고, 그 보물을 팔아 대단한 부자가 되고, 돈이 많으니 자식들이 빗나갔다. 주인공은 모든 것을 잃고서야 인생의 참모습을 대면할 수 있었으니 그것은 가난에 뿌리를 둔 착한 아내의 심성과 대지가 키워낸 복숭아나무다.
딸아이가 무척 힘들어하고 있다. 두 살 터울이라지만 연년생 같아서 어린것들 등쌀에 하루하루가 전쟁터 같은 생활이다. 사위는 애들이 성가시다 싶으면 일요일에도 회의가 있네, 일이 바빠졌네 하면서 뺑소니를 치기에 주야간 전쟁은 주로 딸아이 주도로 치러야 한다. 어떤 때는 사위가 마치도 '대지'라는 영화 속에서 한창 잘 나가던 시절의 ‘왕룽’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언제 이 집에 대한민국같이 개화바람(?)이 불어오려는지 모르겠다.
내 아이는 ‘기쁨의 거리’에 살고 있다. 효자가 많이 난다고 효자동이 아니듯 동네 이름이 그냥 ‘기쁨의 거리’이다. 이곳으로 이사 온 지도 벌써 오 년이나 되니 동네 사람들과 꽤 교류가 있을 것 같을 법도 한데 전혀 그렇지 못하다. 높은 담벼락으로 둘러싸여 사는 우리네보다 울타리 없이 서로 연결된 미국 이웃들이 더 거리가 멀다. 제 잘난 멋에 사는 일등 국민이어서 그런지 고개 숙이고 손 내밀고 지내는 법이 없으니 이웃 소식이 감감할 수밖에 없다. 이곳 사람들은 ‘기쁨의 거리’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고독한 언덕에서 창살 없는 감옥생활을 하고 있을 것이다.
할아버지 할머니라도 자주 들러주면 좋으련만 손자가 보고 싶어도 비행기 삯 겁이 나서 자주 못 간다. 유가 인상 이후 부부가 딸네 집 한번 걸음 하려면 어지간한 젊은이 일 년 치 적금을 탕진해야 할 판이다. 설상가상으로 무비자 협정 이후로는 석 달이 지나기 전에 얼른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아이들을 위해 무언가를 해 주고 가야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으나 마땅치 않았다. 오래 두고 기뻐할 수 있을 선물을 골똘히 생각해 본다. 옳거니, 계속 나무를 심어주자! 이것만이 희망을 불어넣는 유일한 방법이겠다. 사람은 변덕을 부리지만 대지는 묵묵히 기다려 주고, 메마른 땅에서도 꽃을 피워 올린다. 나는 펄 벅의 ‘대지’를 생각했다. 작은 묘목은 언젠가는 큰 나무로 자라나 눈처럼 하얀 꽃잎을 휘날리게 될 것이다. 이태 전 벚나무 한 그루를 심었더니 올봄에는 벌써 새끼손가락 같은 가는 가지에 벚꽃 몇 송이를 매달아 주었다. 올해는 살구나무 한 그루 더 보탰다. 벚나무, 살구나무에 이어 다음 번 방문 기회가 오면 복숭아도 한 그루 심어 볼 생각이다.
북새통 같은 육아노동 덕분에 이제 두 놈 모두 화장실 훈련을 끝냈고, 식탁에서는 제 밥 숟가락질을 하고 있다. 좋다 싫다는 선호를 표현하고 금지와 허락을 구분하는 정도는 되었다. 한 달, 한 해가 다르게 만날 때마다 달라진다. 조금 숨통은 트이지만 아직은 갈 길이 멀다.
애들 설치는 통에 살림살이 하나 반듯하게 차려놓지 못하고 두 다리 펴고 잠 한번 푹 잘 수 없다. 밀고 당기고 울리고 달래다 보면 해가 빠지고, 또 봄날이 간다. 그러나 친정아버지는 자신 있게 딸에게 말해 줄 수 있다. 그래도 지금이 가장 좋은 때라고.
사랑하는 딸아, 모든 것은 일순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그리워지기 마련이란다. 아이 크는 것도 잠깐이고 나무 크는 것도 잠깐이다. 아버지는 어린 묘목이 언제 커서 대지를 덮을까를 염려하지 않는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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