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도 사랑 같아서
석현수
“사랑이 어떻더냐 둥글더냐 모나더냐 길더냐 짧더냐 밟겠더냐 재겠더냐 (조선 중기 작자 미상의 시조)”라는 글에서 사랑은 도무지 알 수 없는 것이라 했다. 마찬가지로 행복도 사랑 같아서 이것이 둥근지 모난지 긴지 짧은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
행복 발전소, 행복 바이러스, 행복의 조건 등등, 행복이란 단어가 부쩍 늘어가고 있다. 이런 와중에 행복을 전도하던 ‘행복전도사’가 세상을 떠났다는 기사를 접한다. 그의 안타까운 죽음은 세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렇게 가는 길이 곧 모든 고통을 잊어버릴 유일한 행복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강한 부정은 늘 강한 긍정으로 이어지는 법이거늘 ‘행복’ 하지 않았기에 행복한 사람으로 불러지기를 좋아했던 것일까? 행복이란 이름 아래 죽을 만큼 큰 아픔이 도사리고 있을 줄을 누가 알았을까? ‘불행’을 모두 ‘행복’이란 보자기에 꼭 꼭 싸두고 있다가 홀연히 떠나 버린 행복전도사의 명복을 빌어 드린다.
행복이란 무엇이냐는 질문은 어쩌면 사랑이 무엇이냐는 질문보다 더 어려운 질문 같다.
내로라하는 재벌들이 모이는 어느 사교계 모임에서 기자는 한 사람씩을 불러 앉혀 당신은 행복한 사람이냐는 질문을 했더란다. 생각 밖으로 재벌들은 우리와 똑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으며, 오히려 어떤 이는 나는 불행한 사람이라고까지 했다고 한다. 그들의 고민은 여타의 사람들과 다를 바 없었으니, 자식 이야기며, 지병持病걱정이며, 돈 걱정이었다 하니 돈이란 아무리 가져도 행복의 척도는 되지 못하는가 보다. 단지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 정도의 ‘Nice to have' 일 것이다.
오래 산다는 것이 행복일까? 산다고 늘 좋은 것만 보고 살란 법도 없다 기쁜 일이 있으면 슬픈 일도 있는 법이거늘 앞으로 벌어질 굳은 일들은 어찌 두 눈으로 보고 살려는가? 눈 뜨고 자식 먼저 죽는 꼴도 봐야 한다면 어찌 그것이 오래 살아 내가 만나 볼 일인가? 오래 사는 것이 희망 사항 정도이면 몰라도 기를 쓰고 오래 살려는 것은 행복이 아니다. 자식이 많다고 행복할까? 자식은 나뭇가지 같아서 가지 많은 나무는 바람 잘 날이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자식에 마음 다친 사람들이 흔히 하는 ‘무자식이 상 팔자’라는 말이 허튼 말이 아닐 것이다. 명예가 행복의 주요 요소일까? 야반에 허름한 복장으로 갈아입고 궁을 몰래 빠져나가 저잣거리의 풍물을 즐기려 했던 왕족들이 있었다면, 이들은 오히려 높아서 불행했던 사람들이다. 성공도, 명예도 행복의 척도가 될 수가 없다는 것을 이들을 통해 안다.
행복을 ‘가지고 싶은 것’에 대한 ‘가진 것’의 비율로 정의를 내리기도 한다. 분수分數에서 숫자 값을 크게 만들기 위해서는 분자를 크게 만들거나 아니면 분모를 줄이는 방법밖에 없다. 따라서 ‘가진 것’을 늘리거나 아니면 분모인 ‘가지고 싶은 것’을 줄여 나가야 한다. 행복을 위해 우리는 어느 것을 택할 것인가? 가진 것을 늘리는 것은 인력으로 되지 않는 것이어서 금력이 동원되어야 한다. 그러나 분모인 ‘가지고 싶은 것’을 줄여 나가는 것은 자기 수양으로 가능하다. 가지고 싶은 것 즉 욕심이 적어지면 행복지수는 높아진다. 그러나 욕망의 전차를 타고 끝없이 날아오르는 인간 군상들에게 과연 욕심 줄이기가 말처럼 그리 쉽겠는가.
<칼 부세>는 그의 집 처마 밑에서 행복이란 파랑새를 찾았노라고 했다. 그 파랑새는 환상 속의 새였기에 생각 하나 바꿔 먹었더니 마음의 평정을 찾았노라는 이야기이지 않겠는가? 세상 어디에도 우리가 생각하는 이상향의 파랑새는 존재하지 않을 테니까. 크게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 또한 크지 않다. 행복은 불행한 사람들이 두 손으로 싹싹 빌어야 도달할 수 있는 종교 같은 것이 아니다. 행복은 미래의 것이 아니라 내가 딛고 선 현실 속에서 현재형으로 존재하고 있다.
다음은 「세잎클로버」라는 글이다.
세잎클로버는 행복幸福이고요,
네잎클로버는 행운幸運이래요.
사람들은
네잎클로버를 찾기 위해
그 많은 세잎클로버들을 짓밟고 있답니다.
네잎클로버를 찾는다면
행운을 거머쥘 수 있겠지요 만
그러나 분명히
행운이란 꼭꼭 숨어 나오지 않을 거예요.
왜냐하면
그것은 비밀스러운 새장 속에 갇혀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네잎클로버는 그 누구의 소유도 될 수 없대요.
세잎클로버는 행복이래요.
행운을 찾다가
행복을 모조리 쏟아 버리지 마세요.
졸저 『여러분도 행복하세요』중에서
우리는 행운luck을 행복happiness이란 이름으로 혼동하며, 행복을 기다리고 있다. 미래형으로 언젠가는 내가 잡아야 할 것으로 착각을 하며 산다. 행복은 클로버처럼 지천에 널려 있는 것인데도 ‘행복’ 인줄을 모르고 매일 밟고 다니며 망가뜨렸다. 큰돈을 번 뒤에, 자식이 성공한 뒤에, 대궐 같은 집을 가진 뒤에 행복하겠지 하는 사람은 결코 행복해 지지 못할 것이다. “인생은 짧다. 희망을 크게 가지지 말라.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순간에도 시샘하는 시간은 지나가나니, 오늘을 붙잡으라. 내일을 크게 믿지 마라”Horace, 『Odes』
‘사랑’이 둥근지 모난지 만져 볼 수 없는 것처럼 ‘행복’ 또한 어떠한 유형의 형체로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행복과 사랑, 이것은 두 단어 모두가 추상명사이니 우리 앞에 가져다 놓고서 만질 수도, 볼 수도 없다. 오직 마음으로 느낄 수 있을 뿐이다. 행복의 추구라는 말은 매우 우스꽝스럽다. “행복을 추구한다면 당신은 결코 행복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C.P. Snow
* The pursuit of happiness is a most ridiculous phrase; If you pursue happiness you'll never find i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