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망증
석현수
“이 칸이야.” 하면서 선반을 두리번거릴 때는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딴에는 섬광 같은 순발력으로 평소 쌓아 온 운동기량을 백분 발휘했으나, 나이가 있어선지 숨 고르기가 한참이나 걸렸다. 마침 역무원 아가씨가 있어 도움을 받았다.
“혹시 선반에 옷 한 벌 보이지 않던가요?”
“아니요 아무것도 없었어요.”
“선생님, 찾는 열차가 확실히 맞으신가요?”
“분명히 승강장 10번에서 내렸고 KTX였어요.”
“열차번호를 확인해 보세요. 도착차량은 모두 이곳에 서 거든요.”
엉거주춤 차표를 꺼내 보니, 그녀의 말처럼 내가 탔던 열차번호가 아니었다. 그곳에는 이미 다음 열차가 들어와 있었던 것이다. 순간적으로 나의 눈썰미에 대한 원망을 했다. 하기야 모두 외형이 똑같아서 전광판에서 일일이 열차번호를 확인해 보지 않는다면 구별이 전혀 불가능하니 눈썰민들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집안 어른들이 계셨다면 아마 싱거운 놈이라는 핀잔을 주었을 것이다. “이것아, 서문시장 갓 쓴 노인이라고 모두가 네 할아버지더냐?”라고. 승강장에 서 있는 KTX치고 서울서 내려오지 않은 KTX가 있었겠는가?
정신을 통째로 놓아 버리다니 오늘 일은 정말 어이가 없다. 집을 나설 때만 해도 날씨가 꽁꽁 얼어붙어 코트에 모자에 장갑에 완전히 중무장했지만 종착역 부산에 오니 서울과는 달라 남도 바닷바람이 한결 부드러웠다. 순간 머릿속으로 동백꽃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동백꽃 필 무렵이로군!”
빨간 꽃봉오리를 피워 올려, 유채꽃보다 한 발 앞서 계절을 알리는 ‘카밀리아Camellia’, 동백꽃, 내가 좋아하는 꽃이다. 국민가수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를 콧노래 부르며 역사를 빠져나와 전철역에 섰다. 순간 어디선가 바람이 휙 하니 불어와 으스스해 지니 본능적으로 무슨 일이 있을 것 같았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기도 하고 웃옷을 툭툭 쳐 보기도 했다. 뒤 호주머니 지갑을 확인했다. 지갑이 제자리에 있음에 무척 위안을 한다. 그래도 무엇엔가 홀린 듯 불안하다. 아뿔싸, 코트며 모자며 목도리까지 모두 열차에 두고 내린 것이 아닌가.
호수에 비친 달을 보다 물에 빠진 달을 주우러 호수로 들다 죽은 사람이 시선詩仙 이태백이다. 갑자기 풀어진 부산 날씨에 지녔던 아침 치장 모두 벗어 던지고, 때 이른 동백꽃 공상에 홀렸던 사람, 서푼 풍각쟁이가 시선의 흉내를 내려 하다니, 제 몸 하나도 못 추스르는 주제에 풍월은 읊을 줄 알아서 허망한 객기를 부렸나 보다. 분실물 센터에서 가까스로 코트를 찾아들고 제 딴은 부끄러워 총총걸음으로 사람들 속으로 숨어들어 버렸다.
잊는 것이 신의 축복이라 하지만, 오늘 사건은 신의 징벌인 듯해서 나를 침울하게 만들었다. 혹시나 병적인 증상은 아닐까 해서 덜컥 겁이 났다. 건망증과 치매는 경계가 모호하다고 하니 치매의 전초전이나 아닐까 싶었다. 배운 지식만큼 눈은 높아지지만, 병은 주워들은 만큼 귀를 엷게 만든다.
가족에게 이야기보따리를 풀었다.
“나 오늘 부산서 큰일 날 뻔했거든, 좀 이상해진 것 같아. 치매 걸린 것 아냐?” 치매나 건망증이 어디 입에 담을 만한 말이기에, 성한 밥 먹고 맑은 정신에 한다는 말인가. 가족은 무척 실망한 나머지 집안이 한동안 소란스러워졌다. 이윽고 아내의 묘한 심문이 이어졌다.
“당신 차에서 내릴 때 허튼 생각 하고 있었지요?”
우산, 장갑 한두 번 잃어버리는 것은 누구에게나 있는 법이란다. 코트 찾았으면 됐지, 공연한 걱정거리 만들어 집으로 물고 오지 않아도 다른 걱정 많으니 긁어 부스럼 만들지 마란다. 아무도 치매나 건망증 같은 중증 분위기로 몰고 가기 싫은 모양이다. 나 또한 섶을 지고 불 속을 드는 공연한 화근거리를 만들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 말을 닫고 말았다.
날씨 탓이려니 하고 모두 웃어버리니 훌륭한 촌극이 되었고, 마음들이 편해졌다. 나를 넋 나간 사람으로 만들었던 ‘동백꽃’이야기는 꼭꼭 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