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망可望고객
석현수
장례식장의 고객은 죽은 시체가 아니다. 사자死者는 말이 없기에 칭찬도 불평도 할 수 있는 몸이 아니지 않은가. 주로 입소문을 내는 것은 그곳에서 장례를 치르러 온 산 사람들이어서 미래의 고객을 더 중시한다.
며칠 전 서양 풍습의 어느 장례식에 참석한 적이 있으며, 돌아가신 분과의 연분으로 운구까지 참여했다. 우리처럼 장의사들이 별난 분들이 아니어서 검정 양복과 넥타이가 아닌 밝고 깨끗한 평상복 차림을 하고 있었다. 침울하고 어두운 분위기와 눈이 마려울 정도의 향내가 진동하는 이곳의 장례식장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꽃바구니 하나만 보더라도 국화 일변도에서 벗어나 흰 백합이나 붉은색 장미 등을 가리지 않고 꽂아 놓았다. 행동은 민첩했으며 망자를 마치도 친구가 자기 집에 들러 잠시 누워 있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대해 주었다. 전체적으로는 인위적인 분위기를 전혀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문상객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었다.
이러한 발상의 전환은 장의사라는 전문직에서 본 긴 안목에 기인한 것 같다. 손님 유치가 워낙 치열하다 보니 어둡고 침침한 공동묘지 분위기로는 경쟁 우위에 서지 못한다. 고객 대접이 죽은 사람 중심에서 산 사람 중심으로 옮아갔다. 상제나 문상객도 구성진 곡성을 터트리거나 눈물바다를 이루지 않는다. 예식을 주관하는 성직자의 말도 추모나 애도 일변도에서 벗어나 남은 자들을 위한 좋은 말씀으로 채웠다.
망자를 제2의 영혼의 삶을 시작한 사람으로 표현했다. 그리고는 간간이 섞는 우스갯소리나 지혜로운 말들이 오히려 분위기를 끌어 올렸다. 우리라면 백수를 넘기고 호상을 한 경우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분위기다. 부모를 여읜다는 것은 자식들이 잘 못 모신 것이라며 유가족을 죄인취급 하던 유교문화권과는 판이하다. 일가친지들은 차례대로 단상에 올라 고인과 있었던 추억담을 나누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고인의 모습을 보고 싶은 사람은 와서 보라고 하더니 잠시 후 조용히 관 뚜껑을 닫았다.
우리는 늘 누군가의 고객이 되어 살아간다. 밥을 먹으러 가면 식당의 고객이 되고, 자동차는 보험 회사의 고객으로 등록된다. 태어날 때는 산부인과의 고객으로 마지막에는 장의사의 고객이 되어 일생을 마감한다. 식당과 보험회사가 서로 경쟁이 치열하듯, 장의사 또한 고객 유치 경쟁이 치열한 곳이다. 이런 경쟁 속에 장의사들이 저승사자 같은 음침한 모습이나 외딴 길가에 있는 으스스한 상여집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서야 경쟁의 우위에 서지 못할 것이다.
손님을 찾아서 고객사냥을 하는 것도 좋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확실한 방법은 식장에 제 발로 찾아온 손님을 미래의 고객으로 사로잡아 두는 일이다. 비유가 적합하지는 않지만, 교회에서는 어른들의 신앙도 중요하지만 주일학교나 청소년 프로그램도 중시한다. 어린이들은 어른을 보면서 자라니까 후일 못자리를 마련하고 있는 것이나 다를 바가 아니다. 만약 방문객들이 자신도 후일 이곳에서 장례를 치러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갔다면 장의사들은 충분히 가망prospective고객 확보에 성공한 셈이다.
떠올리기만 해도 언짢아했던 장의사들이 밝은 모습으로 우리 곁으로 다가온다. 이들은 당신도 죽어 이곳에 오면 후한 대접을 받을 거라는 무언의 신뢰를 직접 심어주고 있다. 그들은 검은 장막 뒤에서 일하는 어둠의 사람들이 아니라, 제 발로 걸어 든 손님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노련한 세일즈맨들이다.
장차 이곳에서 삶을 마감해야겠다는 마음이 들도록 미래의 가망고객에게 사전 만족을 주고 있다. 장의사란 길거리에 나서서 자기 업소를 찾아달라며 전단지를 돌릴 그런 유의 직업이 아니거늘 '지극정성' 밖에는 다른 카드를 내보일 만한 것이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