著書/꽃보다개(2013)

종씨宗氏

온달 (Full Moon) 2015. 4. 16. 14:59

종씨宗氏 

 

석현수 

 

 

같은 성씨를 만나면 으레 촌수를 따진다. 아재비(아저씨)뻘인지 할배(할아버지)뻘인지를 알아보기 위해서다. 나이만 가지고 덥석 형이니 아우니 했다가는 큰코다칠 수가 있다. 때로는 뱃속에도 아재 촌수가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옛날에는 어머니와 시집보낸 딸이 같이 아이를 낳았던 경우가 허다했다. ‘인간 못된 것이 촌수가 높다.’는 말은 촌수를 따지는 과정에서 본인이 손아래가 되었을 때 심기가 불편해서 구시렁대는 말이다.

모임에서의 일이다. 달고 있는 이름표를 보니 같은 성씨다. 성이 같으면 통성명하는 절차가 따로 있다. 먼저 본관本貫을 물어본다. 본관이란 시조始祖, 중 시조中 始祖의 출신지와 혈족의 세 거 지世 居 地로 동족同族의 여부를 가리는 데 중요하며, 씨족의 고향을 일컫는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성씨의 종류가 적어서 300종이 되지 못한다. 같은 혈족의 집안의 수가 많아지게 되어 성씨만으로는 동족을 구분하기 곤란하므로 본관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이후 무슨 공파 몇 대손인지를 묻는다. 나보다 위인지, 아래 항렬인지를 가늠해 보기 위해서다. 확인이 끝나면 어디에 사는지와 연락처를 묻는다. 새로운 인연이 만들어지는 순간이다. 이후, 집안의 친척 한 분이 어디에 뭣 하는 분이 있노라며 자랑거리 하나가 늘어난다. 김, 이, 박이야 너무 많아 반가울 리도 없겠지만 귀한 성씨 간에는 이산가족이나 만난 것처럼 반가워했지 않았던가.

아재’요 ‘할배’요 하는 장유유서長幼有序의 위계질서도 서서히 허물어지고 있다. 얼마 전에는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책도 나왔다. ‘2,000년 전 중국에서 죽었던 공자를 다시 죽이려는 모양이다. “저는 000파 00대손입니다만…….” 해도 상대는 꿀 먹은 벙어리다. 족보를 모르는 사람하고 어떻게 촌수를 따지나. 오히려 이런 것을 밝힐수록 시골에서 자란 서당 출신 취급을 받는다. 아는 내 쪽이 오히려 비정상이다.

서로 소통이 되지 않으니 만국표준으로 한다. 묵시적으로 먼저 세상에 나온 순으로 형님으로 삼겠다는 뜻이다. 성씨 없이 이름만 불리던 돌쇠, 떡쇠, 개똥이, 삼돌이 수준의 천민 짓거리를 하고 있으니 조상님들 욕을 뵈어도 유만부동이다. 때론 흰머리나 주름살만으로 자연스러운 서열이 매겨지기도 하지만, 불행하게도 나는 얼굴이 동안이어서 머리카락도 세지 않고 양미간에 주름도 없다. 내 나이를 물어왔다. 성급한 공격이 시작된다. 자신만만했던 것 같았다. 얼른 답해주고 그쪽의 답을 살폈으나 편한 모습이 아니다. 환갑을 조금 넘겼다고 했을 뿐 다음 말이 없었다.

끗발은 환갑이면 모두 해결 날 줄 알았는데 환갑 위에도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어디 가서도 형님 소리만 들어왔지 한 번도 동생이 되어보지 못한 사람인지도 모른다. 통성명은 기대를 저버린 채 사달이 나고 말았다. 그야말로 내 쪽에서 인간 못된 것이 나이가 높았나 보다. 결과가 나오면 바로 승복하고 그 자리에서 “형님 되시네요.” 한마디만 했어도 해피엔딩으로 끝났을 것이다. 가당치 않은 마무리로 허둥대고 자리를 떠버리니 모처럼의 관계설정은 실패로 끝나고 사람만 머쓱하여졌다.

원래 우리 성씨 수준이 이랬을까? 조선조 초기만 해도 성씨를 가진 양반은 고작 10%에 불과했다고 한다. 바꾸어 말하면 90%가 평민이다. 양반계급이 족보를 가지게 되면서부터 평민들도 구전해 오던 자료에 의하여 족보를 만들기 시작했다. 엿장수 마음대로 쓰고 싶은 직함을 적어 넣다 보니 어느 씨족이든 정승, 판서 정도는 약방 감초로 집어넣었다고 한다. 아무나 가져다 붙였다면 무슨 공파 몇 대손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같은 씨족끼리 족보도 통하지 않는 형국에 원래는 상위 10% 속에 들었던 양반이었노라고 무슨 수로 둘러댈 것인가?

국제결혼으로 다문화가정이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민족이란 용어도 국민으로 치환되어 백의민족이니 단일민족이니 하는 용어가 사라지고 있다. 굳이 공자를 죽이지 않더라도 족보를 볼 수 있는 사람도 거의 없다. 우선 한자를 읽을 재간이 없고, 촌수를 제대로 알고 부르는 사람이 드물다. 사촌을 넘어서면 그냥 일가친지 정도이려니 해야 한다. 그냥 “종씨네요!” 한마디면 족하다. 종씨宗氏는 굳이 촌수를 따질 정도는 못되지만, 그렇다고 가까운 친척인 것도 아니다. 나이까지도 물으면 사족이 되는 관계다. 수첩에는 그날 모임에 종씨를 만났노라고 메모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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