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중산층이다
석현수
인터넷 읽을거리의 신빙성을 6:4 정도로 보고 있다. 특히 가십성 이야기는 믿을 거리가 못되어 심심풀이 땅콩 정도로 생각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때로는 변죽을 울려서 중심을 때리는 순기능도 많아 귀에 담아 볼 이야기가 더러 있다. 좋은 의도를 가지고 공익을 위해 전하는 이야기에는 작성자가 누구이든, 사실 여부가 어떠하든 간에 뜨끔하게 우리의 양심에 대침을 놓는 것들이 더러 있다. 중산층에 관한 기준이 그러하다.
직장인 대상 설문 조사 결과 우리나라의 중산층 기준을 다음과 같다고 소개하고 있다. ‘부채 없는 30평대 아파트에 살면서 월급은 500만 원 이상, 자동차는 2,000cc급, 은행 통장 잔고는 1억 이상을 가지고, 1년에 한두 번은 국외여행을 다녀와야 한다.’ 어떤 이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라며 웃겠지만 어떤 부류는 그 정도라면 나도 중산층이라며 자신만만해 할 것이다. 나는 이 기사를 읽고 분노했다. 아래에 소개하는 서구의 기준과 우리 것이 너무 이질적이고 동떨어져서 마치도 고의적으로 자신을 경제동물로 자학하고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영국 기준은 옥스퍼드 대학에서 내놓은 것이다. 물론 대학에서 제시하는 것이라서 직장인을 대상으로 한 우리 것과는 조사표본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이들이 제시한 중산층의 기준은 역시 영국신사답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페어플레이를 할 것 / 자신의 주장과 신념을 지닐 것 / 나만의 독선을 지니지 말 것 / 약자를 두둔하고 강자에 대응할 것/ 불의, 불평, 불법에 의연히 대처할 것’ 등이다. 이것들은 우리도 추구하는 보편의 가치들이지 그들이라고 별나게 하고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단지 돈에 관한 이야기가 단 한 줄도 없었다는 것 외에는.
프랑스의 퐁피두Pompidou 대통령이 말한 기준은 다음과 같았다. 문화 강국의 수장이 하는 말이니 눈높이에서부터 큰 차이가 있을 수 있겠지만, 이 나라는 대통령이라고 일반 국민하고 동떨어진 삶을 사는 동네가 아니어서 귀담아들어 볼 필요가 있다. ‘외국어를 하나 정도 구사하여 폭넓은 세계 경험을 갖출 것 / 한 가지 분야 이상의 스포츠나 악기를 다룰 것/ 남들과 다른 맛을 낼 수 있는 / 별미 하나 정도는 만들어 손님 접대할 줄 알 것/ 사회 봉사단체에 참여하여 활동할 것 / 남의 아이를 내 아이처럼 꾸짖을 수 있을 것’ 등이다. 이 또한 교양강좌 때마다, 신문사설마다 넘쳐나는 이야기들이어서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나 프랑스 대통령이 내세운 것이나 하나도 다를 바 없다. 특히나 마지막 구절에서 남의 아이를 내 아이처럼 꾸짖던 우리 사회 풍토로 보면 우리가 프랑스보다야 한 수 위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미국인만큼 경제에 밝고 실리를 추구하는 국민도 없다. 따라서 미국은 우리보다 더 넓은 평수의 주거와 월급과 자동차와 은행 잔고를 말할 것 같았지만 그렇지 않았다. 여타의 유럽 국가들과 큰 차이를 보이지 못했다. 미국 공립학교에서 가르치는 중산층의 기준은 다음과 같다. ‘자신의 주장에 떳떳하고 / 사회적인 약자를 도와야 하며 / 부정과 불법에 저항하는 것 / 그 외 테이블 위에 정기적으로 받아보는 비평지가 놓여있을 것’ 등이다. 우리만 너무 솔직하게 속내를 드러냈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누워서 침 뱉는 일이다. 인터넷이야 사통팔달로 뚫어진 것이어서 어느새 말이 새나가 한국인의 가치관이라며 고소하게 인용하고 있는 나라가 많을 것이다. 유대인들이 경제적 동물이라는 누명을 뒤집어썼듯, 이 불명예를 우리가 대신하게 될 것이라는 걱정을 미리 해 본다.
우리나라는 세계 10대 경제 대국이다. 아울러 이에 못지않은 문화선진국 대열로 발돋움하고 있다. 개인소득에서는 차이가 날지 몰라도 소비 생활은 단연 선진국에 진입한 지 오래다. 주거며 자동차며 국외여행 등에서는 가까운 일본이나 앞서 예를 든 영국, 프랑스에 못지않은 두꺼운 중산층이 형성되어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먹고사는 데는 동서양이 크게 다르지 않다. 이미 대한민국은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이면서 문화대국이다. K-Pop의 열기는 세계를 열광시키고 있고, 김치와 비빔밥이 세계적인 음식이 되었으며, 가수 한 사람의 역할로 말춤이 세계의 춤이 되어버렸다. 잘산다는 의미로 쓴 웰빙Wellbeing은 우리가 만든 단어이면서도 영어권으로 수출되어 미국에서도 쓰고 있는 우리식 콩글리시다. 우리가 하는 것이 곧 표준이 되는 시대가 왔다.
배고픔은 지구촌 어디에도 있다. 미국 수도 워싱턴 기차역에서 걸어 나오기가 무섭게 맞닥뜨리는 것은 노숙자〔Homeless〕들이다. 이들조차도 먹여살리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한 사회가 지향하고 있는 것은 전체가 바른쪽으로 갈 수 있도록 방향타를 잘 잡아주는 일이 더 중요하다. 경제논리만을 편다면야 미국이 우리보다 훨씬 앞서 실용주의를 선택했던 나라였으니 제일 먼저 아파트 몇 평짜리부터 말문을 열었어야 옳았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주장에 떳떳하고 / 사회적인 약자를 도와야 하며’로 시작했다. 이제는 우리도 먹고살 형편이 되었으니 이웃 나라 것도 곁눈질해 가면서 살아야겠다. 중산층 하나 정의하는 그만한 일로 은행 잔고까지 들먹여야 하겠는가. 부디 신사 나라 체면 좀 살렸으면 좋겠다. 모두가 길이를 재서 내놓는데 우리만 유독 발가벗기고 몸무게를 달아 세상에 공표할 이유가 어디 있었을까?
예부터 내려오던 선조의 가르침이나 가치관들이 어느 것 하나 서양의 것보다 못한 것이 없다. 우리의 관습, 예절, 도리 중에서 무엇을 갖다 놓는다 해도 제대로 출중해 보일 것이다. 예를 하나 제시해 보자. ‘안에서는 화목한 가정/ 밖에서는 예의범절이 바로 선 사람 / 더불어 살 수 있는 생활능력 / 나라 걱정도 하고 사는 여유 / 남이 잘되는 것이 제 잘되는 것보다 기쁜 사람’ 등으로 이름 해 본다면, 30평 아파트 자랑보다야 훨씬 더 부자 태가 나 보이지 않는가.
생각해 보라, 우리는 일찍부터 중산층으로 살고 있지 않았는지를. 지금까지 서구의 3개국 중산층 요구 기준을 모두 적용하고 살아왔지만 아무런 불편이 없었다. 내 주장을 떳떳하게 내세우는 데 중형차 등록증을 보자는 사람은 없었다. 사회적 약자를 돕겠다는 데에 아파트 등기문서를 확인 후 30평 이상이 되어야 기부금을 낼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월급 500만 원 이상이 아니면 부정 불법에 저항할 수 없다는 법률 조항도 없었다. 그보다 훨씬 낮은 봉급자라도 NGO 활동은 맹렬했다. 누구도 요구하지 않는 기준에 스스로 옥죄어 주눅이 들 필요가 없다. 설령 직장인 설문조사에 나타난 우리 기준에는 턱없는 미달이어도, 서구 기준이라면 우리 모두는 이미 훌륭한 중산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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