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사나 짓지?
석현수
풍파에 놀란 사공 배 팔아 말을 사니/ 구절양장九折羊腸이 물 도곤 어려워라/ 이후란 배도 말고 말도 말고 밭갈이나 하리라. 선조 때의 장만(張晩, 1566~1629)의 시다. 밭이나 갈러 가겠다는 위 시의 작자도 지금에 와서는 마지막 구절을 고쳐 써야 한다. 시골 살기가 얼마나 어려워졌는데, 밭 갈기 정도나 하고 지내겠다고 쉽게 말을 하겠는가? 모든 것 때려치우고 귀농해서 텃밭이나 일궜으면 싶지만, 그것은 배보다 말보다 훨씬 더 어려울 것이다. 시골 사람들 길사 흉사 뒤치다꺼리 때문에 살림이 거덜난단다.
문학을 빌미로 한 나들이는 같이 어울리기가 글쓰기보다 더 어렵다. 정월에는 상당액을 웃도는 각종 회비가 뜯겨 나간다. 분기마다 나가는 문예지 구독료도 수월찮다. 이럴 때는 차라리 일할 때가 좋았다 싶어진다. 세상에 쉬운 일이란 없다. 설령 그것이 놀고먹는 일일지라도 그렇다. 누워서 식은 죽 먹기나 떡 먹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뒤늦게 안다.
설득하던 사람이, 지금에 와서는 설득당하는 사람이 되었다. 귀가 여리기도 하고 겁이 많기도 하다. 열 번까지 찍을 필요도 없이 한두 번이면 후딱 넘어간다. 무척 긍정적으로 산다는 말은 칭찬이 아니라 너무 쉽게 산다는 핀잔일 것이다.
보일러가 고장 났다. 고장 난 부품을 교환해 달라 했더니 곧 다른 곳이 고장 날 거라는 진단을 해 준다. 그건 그때 가서 보자니 내가 하는 셈법이 틀렸단다. 잦은 수리는 배보다 배꼽이 커서 새것 교체 경비보다 더 들어간다고 했다. 아침밥 잘 먹고 전날까지는 생각지 않았던 보일러 교환을 했다. 상당액을 받아갔다.
자동차 은행카드에 가입을 하면 주유할 때마다 몇 십 원이 자동 적립된다고 했다. 오일 교환과 세차도 모두 공짜란다. 친절도 하셔라. 언제 나를 보았다고, 내가 무엇이 예쁘다고 이런 것까지 추천해 줄까? 가입한 지 며칠 되지 않아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가맹 정비 업소에서 오일을 무료로 교환하란다. 무료라는 표현이 경차 기준이었나 보다. 추가 비용 3만 원을 요구했다. 설상가상으로 냉각기에 물이 샌 흔적이 있다며 수리를 권한다. 견적을 달라고 했더니 수월치 않은 돈을 요청했다. 다음 날 자동차 제작사 정비소에 들렀더니 조임 쇠 나사만 죄면 되는 일이라며 그냥 손봐주었다. 오랜만에 구세주를 만났다.
오라는 곳 없어도 갈 곳은 많다더니, 어디 쓸 데가 있을까 싶어도 달라는 곳은 뜻밖에 많다. 얼굴이 조금만 익으면 모임에 이사 맡아 달라는 청탁을 한다. 잘나서가 아니라 나이 때문이다. 사람 대접받는 것 같아 그렇게 하겠노라면 하면 직함의 공정가격은 김일봉(?)이다. 엔 쏠리지가 뭔지 용어도 잘 모른다. <한국의 100인 작가>에 내 이름이 실린단다. 작품 2편을 내면서 고맙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했다. 출판경비 조로 금일봉을 내고 한국에서 유명한 100인 작가 반열에 올랐다. 소가 웃을 일을 했다. 작가 인명사전에도 이름을 올려 주겠단다. 작품과 작가 이력을 보냈다. 금일봉 조로 요구하는 출판물 한 권 가격이 상당하다. 점심때가 채 되기도 전 2교시에 까먹어 치웠던 도시락이 생각난다. 월말에는 통장에서 깡통 소리가 난다.
시골 사람조차도 농사나 짓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세상에 안전지대는 없다. 다시 초식동물이 되어 들판에 서는 수밖에 없다. 먹이사슬의 한 자락을 잡고 기꺼이 육식동물의 희생양이 되겠다는 각오가 아니면 퇴직생활은 스스로 지옥이다. 검소나 절약이 대책이 되지 못한다. 편하게 마음먹는 수밖에는 없다. 상어 떼에 감사하고 살자. 상어가 몰리는 것은 그만큼 내 쪽에 먹을 것이 있다는 증거다. 고쳐야 할 보일러가 있다는 것에 감사하자, 그것은 내게 가정이 있다는 의미이다. 각종 회비에 감사하자, 그것은 나를 불러주고 사람대접 해주는 증거이기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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