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 모음/산문

일본 수필문학 <方丈記 >호조키 A.D. 1212년

온달 (Full Moon) 2017. 1. 10. 21:25



호조키 方丈記 방장기

 

   일본 가마쿠라(鎌倉) 시대인 1212년에 쓴 가모노 조메이(鴨長明)의 수필. 작자가 1177~80년의 전염병대화(大火)(大風)대지진기근(饑饉) 등 여러 가지 천재지변을 사실적인 수법으로 묘사하고, 수많은 천재지변을 겪은 지은이가 인생의 무상함을 통감하고 히노(日野) 산에 들어가 근심 없이 즐길 수 있는 방장(方丈) 암자를 짓기까지의 기록이다. 작자 자신의 불행한 인생을 기술하고 있어 세상의 불안과 무상감(無常感)을 표현한 독특한 기록이다


 

형태 있는 것의 덧없음

 

흘러가는 강물은 끊임이 없지만 원래의 물은 아니다. 웅덩이에 떠 있는 물거품은 한번 사라졌다 다시 생겨나지만 오래도록 그대로 있을 수는 없다. 세상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도 그와 같다.

 

사람이 사는 곳도, 그곳에 사는 사람도 모두 물거품처럼 덧없는 존재이며, 그 속에서 무상함을 다투는 모습은 쉽게 시들어 버리는 나팔꽃이나 덧없이 사라지는 이슬과 같다. 이 세상에 태어나 죽는 사람들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잠시 머무는 이곳에서 누구를 위해 고뇌하고 무엇을 위해 남의 눈을 즐겁게 하는가?

 

철이 든 지 40여 년, 그동안 나 자신이 보아 온 이런저런 세상의 이변’(천재지변)은 모두 사람 사는 세상의 덧없음을 말할 뿐이다.

 

안겐 3(1177) 4월 바람이 몹시 부는 날 밤에 헤이안쿄(平安京, 수도 교토)의 동남쪽에서 불이 났다. 불길은 서북쪽으로 번지며 주작문(朱雀門), 태극전(太極殿), 다이가쿠료(大學寮)를 포함해 모든 것을 하룻밤 사이에 재로 만들어 버렸다. 귀족의 저택만도 16채가 불타 버렸고, 교토의 3분의 1이 잿더미로 변했다. 불에 타서 죽은 자만 남녀 합해 수십 명에 이르렀다. 타 죽은 소와 말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집을 짓고 재물을 쏟아부으며 마음고생을 했던 일들이 얼마나 어리석고 쓸모없는 일이었는가를 통감하지 않을 수 없다.

 

지쇼 4(1180) 4, 나카미카도(中御門) 교고쿠(京極) 부근에서 회오리바람이 일기 시작해 로쿠조(六條) 부근까지 휩쓸어 버린 일이 일어났다. 크고 작은 집들이 바람에 날려 쓰러지고 문과 담장이 날리는가 하면 집 안의 가재도구도 하늘 높이 날아 올라갔다. 흔히 말하는 지옥에서 맛보아야 할 업보 속의 바람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집이 무너졌을 뿐만 아니라 부상을 당하고 불구가 된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회오리바람은 항상 불어오는 것이지만 이때 불었던 회오리바람은 보통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어떤 훈계’(인간을 초월한 신이나 부처의 예시)라고까지 생각되었다.

 

같은 해 6월에는 갑자기 후쿠하라로 천도가 결행되었다. 400년 가까이 수도였던 헤이안쿄를 별다른 이유 없이 바꾸어서는 안 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천황을 비롯한 귀족과 대신들이 모두 옮겨 가는 바람에 사람이 북적였던 동네는 어쩔 수 없이 황폐하기 이를 데 없이 삭막해져 버린 것이다. 새로이 수도가 된 후쿠하라는 토지의 형세가 나빴다. 그곳으로 따라간 사람들 사이에는 옛 수도(헤이안쿄)는 황폐해져 버렸고, 새 수도(후쿠라하)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라며 불안을 감추지 못했다. 이해 겨울에 수도를 다시 헤이안쿄로 되돌렸으나 부수고 떠났던 집들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옛날 어질고 현명했던 시대에는 백성을 살피며 나라를 다스렸다라고 들었다. 그런 옛날에 비하면 지금 이 세상의 어수선함은 어찌 된 일인가. 참으로 알 수 없는 일이로다.

 

요와 연간(1181~1182) 무렵에 2년 동안 기근이 계속되었다. 가뭄에 태풍과 홍수가 겹치고 게다가 역병마저 나돌면서 길가에는 굶어 죽은 자들이 수도 없이 넘쳐 났고 일대는 부패한 시신에서 풍기는 냄새로 뒤덮였다. 실로 지옥이 아닐 수 없었다. 닌나 사(仁和寺)의 승려 류교(隆曉)라는 사람이 죽은 사람의 이마에 불생불사의 상징인 ()’ 자를 적어 주고 극락왕생하도록 임종 의식을 치러 주고 헤아린 사람만 42,300여 명이었다고 한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1185년에는 큰 지진이 일어나 산이 무너지고 바다가 기울고 땅이 갈라지면서 물이 솟아올랐다. 수도에 있던 절이며 신사, 집 등이 모두 무너져 내렸다. 새나 용이 아닌 인간이 하늘을 날거나 구름에 올라앉을 수는 없었다. 3개월이나 여진이 계속되었다. 사람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 것 가운데 가장 무서운 것이 지진이라는 것을 새삼 알았다.

 

소유하지 않는 것의 즐거움

 

세상을 살다 보면 신분과 사는 곳에 따라 생각지도 못한 일을 당한다. 그러기에 처한 상황에 따라서는 분수를 지키며 마음고생을 하는 일이 셀 수 없이 많다.

 

만일 신분이 낮은 자가 권문세가의 옆집에 산다면 기뻐할 일이 있어도 큰 소리로 좋아할 수 없고, 슬픈 일이 있어도 큰 소리로 울 수 없다. 만일 가난한 자가 부유한 집의 이웃에 살고 있다면 아침저녁으로 자신의 남루한 옷차림을 부끄러워하게 되고 처자식들은 오로지 이웃집만 부러워하게 될 것이다. 또 이웃집이 자신들을 무시해도 마음이 동해 편치 않다. 좁은 땅에 함께 살면 이웃집에서 난 불을 피할 수 없으며, 멀리 떨어진 한적한 곳에 살면 왕래가 불편하고 도적 걱정도 많아진다.

 

세상을 따르자니 몸이 고생을 하고, 세상을 거스르면 미치광이로 보이네. 어느 것을 택해 무슨 일을 하더라도 때때로 이 몸을 뉘어 잠시 마음을 쉬게 해야 한다.

 

나 자신은 할머니의 집을 물려받아 한동안 살았으나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는 등 뜻하지 않은 불행이 잇따랐고, 30세가 지나서야 원하던 대로 초암에서 살게 되었다. 초암은 그 크기가 원래 살던 집에 견주어 10분의 1도 되지 않는다.

 

살기 힘든 세상 속에서 마음의 고통을 당하길 30여 년, 더욱이 여러 차례 불행을 겪으면서 내게 흐르는 불운을 깨닫고 50세가 되던 해 봄에 출가해 세상을 등지게 되었다. 오하라(大原) 산의 구름을 베고 덧없이 누워 또 다섯 해의 봄을 보냈다.

 

60, 이슬과도 같은 덧없는 인생의 마지막을 앞두고 새삼스레 여생을 보내기 위한 집을 마련했다. 나그네가 하룻밤 머물 곳을 찾고, 다 큰 누에가 새로 고치를 짓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전에 살았던 곳에 비해 100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는 집이다. 넓이는 불과 방장(사방 한 장 크기, 9m2로서 작은 방 한 칸 크기이다) 크기이고, 높이는 7척 정도(2m)였으며, 지붕을 얹고 기둥과 판자의 이음매는 걸쇠로 묶어 놓아 언제라도 뜯어서 옮길 수 있게 지은 집이다.

 

히노(日野) 산 깊숙이 흔적을 감춘 다음, 동쪽으로 3척 정도 되는 차양을 냈고, 남쪽으로는 대나무 발로 된 발판을 깔았다. 그리고 서쪽에는 불전을 만들었고, 북쪽으로는 장지문을 사이에 두고 아미타(阿彌陀) 부처와 보현(普賢) 보살의 화상을 건 다음 그 앞에 법화경(法華經)[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을 놓았다. 방구석의 동쪽에는 말린 고사리를 깔아 밤에 잠자리로 삼았고, 서남쪽 구석에는 대나무 선반을 매달아 가죽 상자를 3개 올려놓았다. 그 상자에는 와카와 음악에 대한 책과 왕생요집(往生要集)등을 베낀 것들이 들어 있다. 그 옆에는 거문고와 비파가 각각 하나씩 세워져 있는데, 이른바 접을 수 있는 거문고와 분리식 비파이다. 살고 있는 암자의 모습은 대개 이와 같다.

 

봄에는 등나무 꽃이 자줏빛 구름(극락왕생의 증거 중 하나)처럼 서쪽(극락정토의 방향)에서 피고, 여름에는 죽은 사람이 떠나는 길을 안내한다는 두견새가 말을 건넨다. 가을에는 현세의 삶을 슬퍼하듯 우는 매미 소리가 귀를 울리고, 겨울에는 쌓였다가 녹아 없어지는 눈이 깊은 죄업을 생각나게 한다(자연과 종교의 조응, 불교적 자연관이 뚜렷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잠시 잠깐 머문다는 것이 벌써 이곳에 온 지도 5년이 흘렀다. 수도에서는 지체 높은 사람들이 많이 죽었고, 더욱이 신분이 낮은 미천한 사람들은 수도 없이 많이 죽었다. 거듭되는 화재로 인해 불타 버린 집은 그 수가 얼마나 될까. 그저 임시로 살고 있는 이 집만이 평온무사하고 또 아무 불안도 없다.

 

좁다고는 하지만 밤에는 누울 자리 정도는 있어 이 한 몸 쉬기에는 부족함이 없다. 세상 사람들은 처자를 위해, 친구를 위해 집을 짓지만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이 집을 지었다. 생각해 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부유한 사람과 상냥하고 친절한 사람을 벗으로 삼고, 정이 든 것이나 평범한 것은 문제 삼지 않는다. 그러니 차라리 사죽(絲竹, 음악)과 화월(花月, 자연)을 벗 삼는 편이 낫다. 사람들과 사귀지 않으면 차림과 용모에 부끄러워할 것이 없고, 가난하면 변변치 않은 음식도 맛있다.

 

세상은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므로 마음이 편하지 않으면 제아무리 근사한 궁전에 산들 의미가 없다. 쓸쓸한 한 칸짜리 암자지만 내게는 더없이 흡족하다. 수도에 나가 영락한 모습을 부끄러워할 때도 있지만 이곳에 돌아오면 속세의 먼지 속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는 사람들이 가련해 보인다. 물고기는 물을 싫증 내지 않고, 새는 숲을 원한다. 은거 생활이 좋은 이유도 그와 같다. 살아 보면 누구나 알게 될 것이다.

 

이제 내 일생도 어느덧 끝이 가까워 오고 있다. 죽을 날이 멀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 새삼 무용(無用)의 즐거움을 말해 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부처님은 무엇에도 집착하지 말라고 하셨다. 초암의 한적함을 애착하는 것도 왕생에는 방해가 되는 것이리라.

 

세상을 피해 산으로 들어간 것은 불교 수행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나는 정명거사[淨名居士, 유마(維摩)]를 본떠 방장 암자를 짓고, 가장 어리석은 주리반특(周利槃特, 석가모니의 제자)의 수행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자문자답해 보지만 해결책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입을 놀려 아무런 의례도 없이 아미타불을 두세 번 읊조려 볼 뿐이다.”


번역 작품출처

절대지식 일본고전』 511~523쪽, 마쓰무라 아키라 지음 ·윤철규 옮김 

이다미디04,   2008 서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