著書/美世麗尼(2018)

백세 시대에

온달 (Full Moon) 2018. 2. 19. 11:36



백세 시대에

 

 

날마다 같은 벤치에 앉아 하루를 보내는 노인이 있다. 언제나 그러하여 아무런 생각이 없는 듯 하늘만 보고 멍 때리고 있다. 요란한 라디오는 자식들이 준비해 주었을까? 소리통을 늘 켜둔 상태로 놓아두어 건전지를 소모하고 있다.

 

정작 본인은 듣지도 않으면서 왜 저럴까. 주위 노인들을 위해 노래 보시布施를 하고 있겠지. 장단도 노래 흥도 없으면서 종일 벤치를 덥히고 있다. 오전에는 이쪽에서 오후에는 저편에서 시간을 흘려 보낼 뿐이다.

 

가지런히 의자에 벗어 개켜놓은 한 마리 매미 허물 같다. 그래도 누군가의 아버지겠지. 부모는 자식의 껍데기라더니. 껍데기는 삭정이처럼 야위어있다. 노인은 혹여 남겨놓은 시간이라도 있을까 봐 알뜰히 세월을 소진하고 있는 것일까. 마지막 물기 한 점이라도 걷어내기 위해 가을 햇볕에 몸을 말리고 있는 것일까.

 

백세 인생이란 노래가 흘러나온다. 노인은 무관심한 나머지 흥이 없다. 라디오 혼자 노래 부른다. 노인이 정물靜物이라면 노래는 배경음악이다. 배경음악이 노인을 아름답게 하는 것이 아니라 더 궁상맞게 만든다.

 

노인에게 100세 시대는 무엇일까? 기쁨일까? 고통일까? 아직은 젊어서 못 간다고 버틸 처지도 아니면서, 할 일이 남아 못 간다고 변명할 입장도 아니다. 아직은 쓸만하다기엔 중고를 넘어 너무 낡았다.

 

백 세까지는 너무 길다. 저승사자 멱살이라도 잡고 늘어져야 한다. 노인들이 하는 ‘죽어야지’는 그냥 해 보는 소리가 아니다. 밑지고 판다는 장사치의 말은 거짓이 있을지라도, 노인이 하는 ‘빨리 죽어야지’는 결코 빈말이 아니다.

노인이 되어보라 그제야 노인네 마음을 알게 될 것이다. 노래처럼 이 핑계 저 핑계로 늦게 가겠다며 흥정하지 않을 것이다. 저승사자와 승강이보다는 어서 날 데려가 주십사 부탁하고 싶은 것이 노인의 속내다.

 

백세 시대가 모두에게 즐거운 희망사항이 될 수는 없다. 갈 때 되어 떠나야 복 노인이다. 오늘도 내일도 그 자리에 벤치를 덥히고 앉아 있어야 하는 노인들. 경기장에 다시 나갈 후보 선수도 아니면서 영원한 대기 후보benchwarmer로 공원을 지키는 노인들. 나는 이럴 때 백세 시대의 공허함을 느낀다.

 

백세 시대는 희망일까, 절망일까? 숨만 쉬고 있다 해서 사는 즐거움이 연장될 수는 없을 것이다. 백세 시대는 그야말로 노인들에게 소름 돋는 주문呪文이다. 노래 속 마지막 떠나가겠다는 소망일; ‘좋은 날 좋은 시’가 따로 없다. 떠나는 날이 복받는 날이 될 것이며 장례葬禮 날이다. 저승사자에게 전해라. 불러만 주면 언제든 따라가겠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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