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훈家訓 하나
쓰레기장으로 내놓은 액자가 내 눈을 끌었다. 먹고 살기가 좀 나아지면 가훈이 바뀌나 보다. 오래 걸어 놓았으니 치렁치렁해 보이기도 하여, 좀 유식해 보이고 광채나는 걸로 새 단장하고 싶지 않았을까 싶다. 보통 글 솜씨가 아닌 걸 보니 상당한 작가에게 청해 귀하게 구한 것임이 틀림없다.
유리로 케이스로 덮은 표구 작품이니 돈 꽤나 투자했을 것이다. 가훈은 때론 집안 내력으로 대를 이어 내림하기도 하여 뼈대 있는 집안에서는 신줏단지 모시듯 하기도 한다. 지금은 인터넷 홍수시대를 만나 좋은 글 몰라 좋은 행동 못 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어지간한 좋은 말은 잘 배우나 못 배우나 없이 귀에도 익고 눈에도 익다. 사서삼경이나 읽어야 사자성어 한 줄 들이댈 수 있는 옛날과는 사정이 다르다.
가훈은 이사를 할 때마다 새것으로 갈아 매다는 집이 많다. 내용보다는 외형이어서 일단 누렇게 빛이 바래거나 액자에 흠이라도 조금 생기면 당장 새것으로 바꾼다. 내용은 별개의 문제여서 누가 썼다거나 무슨 말이거나가 큰 문제가 아니어서 한문 한글을 특별히 구분하지 않는다. 버려진 액자가 아깝다 싶어 경비실로 들여라 하니 아저씨의 표정도 그리 반가운 표정이 아니었다.
가훈은 귀중품 리스트에서 빠진 지 오래되어 별로다 싶으면 버리는 물건이 되었다. 치레로 전락하여 늘 새것이 옛것을 몰아낸다. 경비 아저씨께 권했다. 혹시 좋은 글귀 하나 걸어 두고 싶거든 이것 가지라고 했다. 내용이 무엇이냐고 묻기에 대충 설명해 주었다. 마침 액자 상태도 큰 흠이 보이지 않고 글 내용도 괜찮으니 싫어하지 않았다. 남이 버린 가훈 하나가 누군가의 가정에 든든한 버팀목으로 다시 태어나길 바랬다.
액자 내용은 이러하다.
滿招損 謙受益만초손 겸수익:
‘가득 차면 손실을 부르고, 겸손하면 이익을 얻는다’는 의미다. 뜻을 몰라서가 아니라 거실 분위기를 바꿔 볼 양으로 내놓았겠지. 필요한 사람 있어 가져간다면 좋겠다는 생각에 딸 시집보내듯 조심스레 내놓은 흔적에 좋게 생각하기로 했다. 다른 이의 모퉁이 돌이 된 버려진 돌 생각이 났다. 욕심 부리지 말라와 겸손하라는 말은 누가 들어도 좋을 말이니 이를 싫어할 사람이 세상 어디 있을 법이나 할까.
* 참고사항
滿招損 謙受益: 『서경(書經)』
제1편 우서(虞書) 제3장 대우모(大禹謨)의 글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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