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밤
이 향 아
밤이 익숙하게 왔습니다
그는 이미 손님이 아닙니다
잘 익은 포도처럼 취기를 몰고서
날더러 두렵지 않게 잠기기를 권하는
잠겨서 잊을 것은 잊고 버릴 것은 버리라고 이끄는
집요하고 몽매하고 거대한 밤
나는 이미 순종하기로 했습니다
이불을 턱밑까지 끌어당기면서 진저리를 치면서
얼마나 다행인가
나는 온 하루, 휘청대던 시간을 감추고 뻗은 발아래 출렁대는
푸른 바다 같은 슬픔을 덮어버리기로 했습니다
날마다 결산을 하듯이 밤이 와서
질컥이는 이랑 속으로 나를 휩쓸고 덧없는 열정과 후회
승산 없는 욕망을 내리게 하는 것은 다행입니다
날이 새면 나는 오리발을 내밀 듯이 일어날 것입니다
망각의 물살이 휩쓸고 지나간 폐허와 같이
생소한 낯빛으로 일어날 것입니다
행여 오늘을 되돌려 캐물을지라도 더듬거리며
먼 과거처럼 추억하게 될는지도 모르지요
밤이 나를 천 길 바닥으로 끌어당깁니다
익숙한 밤입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망설이면서 눈을 감습니다
이향아 시인
출생 1938년 7월 24일, 충남 서천군
데뷔 1966년 '현대문학' 등단
1998년 호남대 인문과학대 인문학부 국어국문학전공 교수
수상 2003년 제40회 한국문학상 '시집 꽃들은 진저리를 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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