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글 모음/운문

어느 대나무의 고백

온달 (Full Moon) 2019. 9. 2. 08:24





어느 대나무의 고백

 

- 복 효근 -

 

 

늘 푸르다는 것 하나로

내게서 대쪽같은 선비의 풍모를 읽고 가지만

내 몸 가득 칸칸이 들어찬 어둠 속에

터질 듯한 공허와 회의를 아는가

고백하건대 나는

참새 한 마리의 무게로도 휘청댄다

흰 눈 속에서도

하늘 찌르는 기개를 운운하지만

바람이라도 거세게 불라치면

허리뼈가 뻐개지도록 휜다, 흔들린다

제 때에 이냥 베어져서

난세의 죽창이 되어 피 흘리거나

태평성대 향기로운 대피리가 되는 ,

정수리 깨치고 서늘하게 울려퍼지는 장군죽비

하다못해 세상의 종아리를 후려치는 회초리의 꿈마저

꿈마저 꾸지 않는 것은 아니나

흉흉하게 들려오는 세상의 바람소리에

어둠 속에서 먼저 떨었던 것이다.

아아, 고백하건대

그 놈의 꿈들 때문에 서글픈 나는

생의 맨 끄트머리에나 있다고 하는

그 꽃을 위하여 시들지도 못하고

휘청, 흔들리며, 떨며 다만,

하늘 우러러 견디고 서있는 것이다. 

   

 

복효근 1962년 전북 남원 출생. 전북대 사범대 국어교육과 졸업. 1991년 《시와시학》으로 등단. 시집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버마재비 사랑』『새에 대한 반성문』 『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목련꽃 브라자』, 시선집 『어느 대나무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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