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대나무의 고백
- 복 효근 -
늘 푸르다는 것 하나로
내게서 대쪽같은 선비의 풍모를 읽고 가지만
내 몸 가득 칸칸이 들어찬 어둠 속에
터질 듯한 공허와 회의를 아는가
고백하건대 나는
참새 한 마리의 무게로도 휘청댄다
흰 눈 속에서도
하늘 찌르는 기개를 운운하지만
바람이라도 거세게 불라치면
허리뼈가 뻐개지도록 휜다, 흔들린다
제 때에 이냥 베어져서
난세의 죽창이 되어 피 흘리거나
태평성대 향기로운 대피리가 되는 ,
정수리 깨치고 서늘하게 울려퍼지는 장군죽비
하다못해 세상의 종아리를 후려치는 회초리의 꿈마저
꿈마저 꾸지 않는 것은 아니나
흉흉하게 들려오는 세상의 바람소리에
어둠 속에서 먼저 떨었던 것이다.
아아, 고백하건대
그 놈의 꿈들 때문에 서글픈 나는
생의 맨 끄트머리에나 있다고 하는
그 꽃을 위하여 시들지도 못하고
휘청, 흔들리며, 떨며 다만,
하늘 우러러 견디고 서있는 것이다.
복효근 1962년 전북 남원 출생. 전북대 사범대 국어교육과 졸업. 1991년 《시와시학》으로 등단. 시집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버마재비 사랑』『새에 대한 반성문』 『누우떼가 강을 건너는 법』『목련꽃 브라자』, 시선집 『어느 대나무의 고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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