著書/주관산문(2022)

암까마귀 수까마귀의 논쟁

온달 (Full Moon) 2022. 5. 3. 15:37

 

 

 

암까마귀 수까마귀의 논쟁

 

석현수

 

 

 

수필아, 너는 어디에 있느냐? 숨바꼭질을 그만두고, 냉큼 내 앞으로 나서 본래 너의 얼굴을 보여 다오. 너는 보이지 않으면서 ‘보라, 이것이 수필이다.’라고 외치는 소리만 무성하니 갑갑하여라.

 

 

 수필이론은 체중 제한 없는 복싱 경기인가? 수필로 평생을 보낸 거목(巨木)도 수필을 말하기도 하고 갓 시작한 신출내기도 이것이다 저것이다 쌈을 가르고 있으니, 지금은 수필 이론의 백가쟁명百家爭鳴 시대에 살고 있다. 수필에 대한 일가견은 작가 수 만큼이어서 해마다 늘고 있는 수필가만큼 이론도 그 갈래를 더해갈 것이다.

 

이론 자체를 탓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론은 매우 중요하여 제대로 글을 쓰려면 이것을 잘 알아야 한다. 이론을 모르고 실전만 익힌다면 결국 정석이 되지 못하고 꼼수로 전락해 버린다. 꼼수 앞에는 벌(伐), 잡(雜), 개[犬]란 접두어가 붙어 한 등급 아래 대접을 받는다. 바둑에서 벌 바둑이라 하고, 수영에서는 개헤엄이라 하며, 수필에서는 잡문, 잡기(雜記)로 하대(下待)하여 문학이란 족보에 서자 취급을 당한다. 이론은 기본이다. 그래서 글을 잘 쓰려면 기본 이론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

 

 그렇다면 이 많은 이론 중, 어느 것이 암까마귀이고 어느 것이 수까마귀란 말인가? 꼭 옳고 그름이 아니더라도 우열이라도 가릴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것조차도 어렵다. 서로 목소리가 다른 것은 문학이란 속성 때문에 다양성을 인정해야 하겠지만, 그 편차가 너무 커서 전혀 합의점이 없는 것은 낭패다.

 

 열대어 중 ‘키싱’이란 물고기는 늘 두 마리가 입을 맞추고 있다. 그래서 키싱이라고 불러왔다. 그러나 사실은 서로 맞대고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애정 표시’와 ‘몸싸움’의 차이는 서울과 부산 거리이다. 수필에서 서로 상반되는 이론들의 거리는 이보다도 훨씬 더 멀리 있다.

 

 수필에 발을 들여놓으며 가장 힘들어했던 것이 기성 작가들의 저마다의 혼란스러운 이론들 때문이었다. “수필아, 너는 어디에 있느냐? 숨바꼭질을 그만두고, 냉큼 내 앞으로 나서 본래 너의 얼굴을 보여다오. 너는 보이지 않으면서 ‘보라, 이것이 수필이다.’라고 외치는 소리만 무성하니 나는 갑갑하여라.” 수필 공부를 시작하면서 내가 했던 푸념이다. 수필이론에는 궤변도, 우문현답도 많다. 몇 가지만 소개해 보기로 한다.

 

 

수필은 형식이 ‘있다’‘없다’에서 우문현답으로 ‘무형식의 형식’도 한 형식의 몫을 한다는 말이 나오기도 하고

 

기승전결이 ‘있어야 한다’‘없어야 한다’에서는 논문에서나 할 소리라며 머리를 펄쩍 뛰는 분이 있는가 하면 논문이든 수필이든 무릇 산문 문장이라면 기승전결이 뼈대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이도 있다.

 

붓 가는 대로‘써라’와 붓 가는 대로‘써서는 안 된다’라는 대립도 웃긴다.

용재수필, 열하일기까지 들먹거리다가 분이 풀리지 않으면 돌아가신 금아 선생과 국정 교과서까지 화풀이 대상이 된다.

 

‘수필’과 ‘에세이’는 ‘같다’와 ‘다르다’라는 상반된 주장에는 국문과 영어의 차이로 알아도 좋을 것이라는 친절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서정적인 우리 수필에 반해 에세이는 서양 것으로 논리를 바탕으로 전개해 나가는 것이니 ‘별개의 것’이라는 주장을 한다. 발 빠른 문예사는 아예 ‘에세이 수필’이라는 두루뭉수리 이름을 붙여 시비의 중간에 서기도 한다.

 

수필은 속임과 꾸밈이 없는 ‘진솔한 자신과의 대화’라고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수필도 예술성과 문학성을 높이려면 반드시 ‘문학적 상상이 동원’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단수필이 모든 것이 짧아지는 현대인들의 취향에 맞아‘앞으로 대세’라며 발전적 방향이라며 반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것은 15~20매도 짧은데 5매 정도의 원고지 속에 어찌 산문의 형식을 갖출 것이냐며 수필 분야 발전에 큰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분들도 있다.

 

방법론에서는 수필은 ‘많이 써야’ 제대로 된 글을 쓰게 된다는 주장과 ‘적게 써도’제대로 된 글을 써야 한다는 상반된 주장이 있다. 물론 하나를 써도 바르게 많이 쓰라는 것으로 알아듣고는 있지만 한 가지도 어려운 지경에 두 가지를 합해보기는 그 일이 입문자에게 말처럼 쉬울 것인가.

 

수필을 시와 대등하게 ‘낭송’하는 문학으로 저변을 넓혀가야 한다는 주장과 수필은 귀로 듣는 문학이 아니라 눈으로‘읽고 느끼는 글’이란 이유로 수필낭송을 만류하는 쪽도 많다.

 

 물론 모두가 맞을 수도 있으니 나도 맞고 너도 일리가 있노라 사이좋게 넘어간들 어떠랴. 부엌에서 하는 며느리 말과 안방에서 하는 시어머니 말 모두가 맞는 황희 정승의 처세로 옥석을 가리지 않는다. 가뜩이나 수필 이론이 빈곤한 마당에 몇 안 되는 이론마저도 일치를 이루지 못하고 있다. 인문학 속에 문학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다양한 이론은 반갑고 수필의 바람직한 발전 방향이라 여겨지기도 하지만, 일인일설一人一說의 현재 상황이 오래 지속하면 수필 문학에 득보다는 실이 많을 것이 될 것을 우려한다.

 

 대학이나, 구청이나 동사무소, 웬만한 백화점 위층에는 문화 교실이 있어 수필을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이론이나 배움도 없이 자질만 가지고 이 길에 발을 담그려는 용감한 천재는 더는 없을 것이다. 모두 제대로 배우고 제대로 쓰고자 하는 열의로 모여드는 사람들이다. 대학 강단을 제외하고는 밖에서 열리는 문학 강좌는 대다수 수필이어서 강좌마다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수필의 질과 양을 동시에 키울 좋은 기회가 아닌가 생각한다. 이런 때에 체계적이고 통일된 가르침이 없이 오직 강좌를 주관하는 작가의 나름의 생각이나 이론에 맡긴다는 것은 안타깝기만 하다.

 

 태권도를 배우러 도장에 가면 바로 겨루기를 시키지 않는다. 몇 달 동안은 품세를 먼저 배운다. 품세라는 것이 태권도의 기본동작이며 수필로 치면 수필 이론이다. 수필 쓰는 사람은 어떤 형태로든 수필 이론은 반드시 익혀야 한다. 그리고 그 이론은 통일된 것이어야 한다. 마치도 한국의 태권도와 세계의 태권도가 다르지 않은 것이 어딜 가나 똑같이 적용되는 품세 때문이다. 서로 다른 사람을 통해 수필을 공부하더라도 기본 틀 플러스알파의 교육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작가들끼리도 말이 서로 서툴게 들릴 것이다.

 

 그렇다면 수필 이론을 확대 재생산해 내야 할 주체는 누구일까? 논란의 여지 없이 수필 계를 대표하는 사람들이 모인 한국수필 문학회이며, 그 중에서도 이름 있는 원로들의 몫이 되어야 할 것이다. 화합을 위한 행사보다도 더 중요한 일이 삼삼오오로 흩어진 이론들의 교통정리와 수필 이론서의 발간이다. 이론異論이 많으면 많은 것일수록 빨리 손을 써서 옥석을 가려놓아야 확대해석이나 분열을 막을 수 있다고 본다. 말썽이 많았던 우리말 맞춤법도 맞춤법위원회에서 통일해 주니 모두 한곳으로 주목하여 어려움이 말끔히 해소되지 않았던가? ‘떢뽂이’,‘떡뽂기’,‘떡복이’,‘떡볶기’가 ‘떡볶이’로 되듯 어렵지 않은 일이라 생각한다.

 

 수필식구들도 지그시 기다리는 맛이 있어야 한다. ‘떴다, 보아라.’하면서 성급히 내는 목소리의 주인공도 문제지만, 맞장구를 처가며 합세하는 사람들도 혹세무민의 죄를 같이 물어야 할 것이다. 잘못된 것이 있으면 일깨워 주어야 하고, 타당성이 있으면 작은 말썽의 소지라도 걸러낸 다음 협회에서는 정설(定說)로 발표해 주어야 한다. 반짝거리는 것이라고 해서 모두 금은 아니다. 지나치게 현란한 장식품들은 오히려 모조품일 경우가 많다. 통제되지 못하니 의욕이 너무 넘쳐날 경우 심지어는 고인이 된 분까지 들먹거려 가며 생전의 공로를 허물려 들고 있다.

 

 수필 이론이 시골 초등학교 과자 따 먹기 경주가 되어서야 할 일이 아니다. 서두르는 사람이나 욕심 많은 사람이 독불장군으로 밀어붙일 일이 아니다. 내 발자국 하나가 뒤따르는 다음 사람에게는 곧 길이 된다는 것 때문에 눈길에 발자국을 조심스레 남겼던 선현들의 지혜를 생각해 보면 좋겠다. 한 사람의 주장 뒤에는 여러 사람의 검증이 반드시 따라 주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명석한 개인도 발전할 수 있을 것이며 뒤따르는 수필 문인들의 혼란스러움도 사라질 것이다.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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