著書/기쁨거리(2011)

할머니의 추억

온달 (Full Moon) 2015. 4. 15. 09:54

할머니의 추억 

 

석현수 

 

 

페트리샤((出 1925. 2. 4 ~ 歿 2011. 3. 24))는 미국 유타 주의 시인이다. 그의 대표작은 ‘시간의 조각들Time Pieces’이며 유타문인협회의 원로시인으로 활동하였다. 2011년 3월 향연 86세로 영면하였다.  

   

페트리샤를 아이들이 할머니라 불렀다. 처음에는 호칭도 어쭙잖고 해서 아이들이 하는 대로 나도 같이 할머니라 부르기 시작했던 것이 그만 30년이 넘었다. 한 번도 면전에서 그분의 이름을 직접 불러 본 적은 없다. 동양에서는 어른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다고 했더니 연세 대접을 받는 것 같아서인지 페트리샤란 이름보다는 할머니 호칭을 더 좋아했다.  

   

할미꽃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달린다고 했거늘 할머니가 그러했던 것 같다. 할머니는 처음부터 하얀 백발이셨다. 할머니의 조상은 아일랜드계 미국인이다. 원래 아이리쉬Irish들은 머리카락 색깔이 옅은 회색이어서 태어날 때부터 흰머리를 가진다. 이른 봄 무덤가에 피는 할미꽃은 하얗고 보송보송한 털을 달고 난 꽃 모양부터가 호호백발이어서 할미꽃이라 부르지 않던가. 빨간 립스틱을 짙게 바르고 나들이 나설 때는 하얀 머리에 빨간 입술이 꼭 할미꽃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자린고비  

 

할머니는 보기 드물게 알뜰한 분이었다. 선물을 받으면 포장을 조심스럽게 벗겨 모아 두었다가 포장지로 재사용한다. 아이들에게 건네는 작은 물건도 포장 없이 선물하는 법이 없으니 모두가 짬짬이 접어 챙겨둔 포장지 덕분이다. 한번 손에 들어온 것은 쓰레기가 되기 전에는 밖으로 내보내는 일이 없을 정도여서, 서랍은 항상 잡화상같이 다양한 잡동사니로 넘쳐났다. 이 점에서는 한국의 자린고비 할머니들과 다를 바 없다. 살림이 궁색해서도 아닌데, 그냥 근검절약이 몸에 배어버린 것이다. 세제를 많이 사용하는 요즈음 설거지에는 수도꼭지를 틀고 물을 흘려보내야 남은 세제가 깨끗이 씻겨 내려간다 해도 굳이 개수대에 물을 받아서 헹구었다.  

   

금실  

 

할머니는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마을 장승 이야기도 좋아했고, 전통혼례에 등장하는 한 쌍의 원앙에 대한 의미도 좋아했으며, 특히 백년해로의 동양식 부부 관을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 9년 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공원묘지에 명판을 만들어 붙이면서 할머니 분과 할아버지 분을 따로 주문했다. 몇 년 동안 이것이 늘 마음에 켕긴다고 했기에, 이번 장례를 기해 한 장의 명판에 두 사람의 이름을 같이 새겨 넣었다. 미국이란 자유분방한 나라에서 평생을 한결같이 한눈팔지 않고 서로 순애보로 살다 가셨다. 지금쯤 할머니는 먼저 간 할아버지를 만나 지상에서 했던 것처럼 또다시 하늘나라 유희를 즐기고 있을 것이다.  

  

어머니  

  

남편 일주기에 할머니를 찾았다. 떠나올 때 할머니는 남편이 썼던 중절모와 접이식 등산용 칼 한 자루를 챙겨 주면서, 편지 한 장을 써서 속에 넣었다. 물론 수화물 짐 속에 넣으면 크게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상황이 9.11테러 직후인지라 수화물도 무작위로 내용물을 조사하고 있어 칼은 충분히 문제를 일으킬 수 있어 걱정하신 것이다. “관계자 분께, 이 칼은 지난해 돌아간 남편의 유품으로 꼭 이 사람이 가져가야 합니다. 어려우리라는 것을 짐작하면서도 짐 속에 넣었으니, 가지고 갈 수 있도록 꼭 도와주세요." 공항에서는 할머니의 편지도 보일 필요도 없이 무사통과가 되었지만 그건 내가 운이 좋아서 라기 보다는 어머니 같은 마음으로 나의 무사 귀가를 간절히 빌어주었던 할머니의 정성 덕분이었다.  

  

아이들의 할머니  

 

일흔을 넘기자 두 내외는 기력이 달린다 하여 산속에 마련한 캐빈(통나무집)을 처분했다. 퇴직 후 모처럼 큰돈을 만진 것이다. 마침 내가 수원으로 주거지를 옮겼으니 새살림도 궁금하고, 여윳돈도 되겠다, 두 분이 한국을 찾았다. 할머니는 소심한 분이어서 눈치를 한참 살피더니 은행으로 안내해 달라고 했다. 은행을 간 목적은 초등학생이던 우리 아이 셋에게 각각 30만 원씩 통장에 정기 예금 시켜 주라는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캐빈을 처리한 후 미국에 있는 손자들에게도 300불씩 나누어 주었으니, 한국 아이도 똑 같이 받으라는 것이었다. 훗날 아이들이 크면 적은 액수지만 요긴할 때가 있을 줄 모른다고 했다.  

  

시인  

 

할머니는 꽃을 좋아했고, 새를 좋아했다. 그래서 정원에는 사철 꽃이 있었고, 새들이 모여들었다. 모이대가 잔디밭 중앙에 있어 새들은 모이를 쪼았고, 할머니는 종지에 물까지 부어 놓고 이들을 목마르지 않게 했다. 테라스에 앉아 알프스의 소녀가 된 듯 시심에 잠긴 시인의 모습은 정말 아름다웠다. 장미를 혼자 보기가 아깝다며 가장 탐스러운 놈을 전지가위로 뚝뚝 잘라 남편 산소로 가져가는 일이 시인이 아니면 가능한 생각일까? 할머니의 벽시계는 특이했다. 틱톡택톡 하는 괘종시계가 아니라 시간마다 바뀌는 새소리 차임벨이다. 밤에는 차임벨 새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하고, 아침에는 정원의 새소리로 아침을 맞았다.  

   

철새  

 

천성적으로 기관지가 약했던 분이라 해소와 잔기침을 달고 다녔다. 겨울이 시작되는 11월이면 떠날 준비를 했고, 3월이 가까워야 강남 제비같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추위를 피해 남쪽으로 가는 노인들과 긴 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해마다 만나는 길동무들을 또 다른 이웃이라고 불렀다. 멕시코 국경을 넘어 아열대 지방까지 이동하기도 하고, 아예 하와이로 후퇴해 겨울을 나고 돌아오기도 했다. 역마살이 끼어 길 나서는 방랑자vagabond의 멋보다는 살아나기 위한 생존의 한 방법으로 강남 제비가 되었다. 

    

편지  

 

할머니 편지엔 무언가 물고 늘어지는 물귀신 성미가 있었다. 답을 드리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편지를 쓰도록 하는 강제수단을 동원한다. 아이가 결혼했다고 소식을 보내면, 신랑 이름이 뭐냐고 답장해 달라 하고, 손자가 났다고 편지를 보내면, 이내 몇 파운드짜리 아이였는지를 알려 달라고 했고, 내가 지은 책 한 권 보내드리면, 한국어라 모르겠으니 대표작 하나를 영어로 번역해 줄 수 없느냐고 억지를 부리기도 했다. 마치도 스무고개 놀이를 하듯 편지를 이어가는 것이 할머니의 지혜로움이다. 의도된 요구사항들 때문에 연락은 서로 끊어질 새가 없었으며, 이것이 두 가족 사이에 인정의 가교架橋를 이루어 주었다. 

 

부음  

 

딸, 캐더린 으로 부터 e-메일이 왔다. 아무래도 며칠 더 못 사실 것 같다는 호스피스의 귀띔이 있었단다. 이튿날엔 혹시라도 변고라도 있을까 싶어 메일을 열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건 무리한 기대였다. 짧은 부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마도 메일을 띄우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운명했던 것 같다. 인천에서 뉴욕까지 13시간의 비행, 다시 국내선으로 갈아타 4시간, 꼬박 하루 간의 긴 비행 끝에 할머니와의 마지막 송별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 할머니는 곱게 화장을 하고 나를 기다린 듯 누워있었다. 할머니의 주검을 뵙는 순간 그동안 아이들의 훌륭한 역할을 했던 '할머니'는 갑자기 사랑하올 '어머니'의 모습으로 내게 다가왔다. 생전에 한 번도 불러드리지 못한 '어머니'란 이름으로 나는 페트리샤 할머니의 죽음을 애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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