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탕 서열
석현수
네가 내 것 보고 내 또한 네 것 보니 서로 가릴 것 하나 없고 쑥스럽지 않아서 좋다. 수증기가 연기처럼 자욱한 곳을 밀림이라 하자. 물을 물 쓰듯 하며 고개를 숙이고 연장을 갈고 있는 이들을 원시인이라 하자. 밀림 속의 원시인들, 동굴마다 털 봉숭아들이 땀을 흘리고 있다. 열 받는 곳, 한약재를 매달아 놓은 곳, 소금단지가 놓인 곳, 쫓아다니다 마지막에는 얼음장 물에다 담금질 한다.
언어가 생기기 전이다.
뜨거운 곳에서도 시원하다면서 ‘어허~ 어허~’를 연발한다. 유인원類人猿이 사는 곳이어서 긴팔원숭이, 고릴라, 침팬지, 오랑우탄 따위가 같이 어울린다. 일찍 들어와 돌바닥에 잠든 고릴라 놈이 보인다. 엄청난 크기의 거시기도 축 늘어져 주인과 같이 잠이 들었다. 어지간히 설치다 들어온 드센 놈인가 보다. 그놈 앞에선 노란 털도 건드리지 않으려 조심한다. 스스로 타잔에 나오는 침팬지 ‘치타’ 같다는 생각을 했다. 물이 튀지 않도록 조심한다. 물바가지를 함부로 가져오지 않는다.
산에 가면 산 잘 타는 이가 왕이듯 벗고 사는 곳에서는 체격이 우람한 놈에게 우선권이 주어진다. 정글의 법칙이 철저히 존재하는 곳이다. 물건이 좋아도 한 가락 하고 초콜릿 복근이라도 있으면 금상첨화다. 팔뚝에 용이 아니라 뱀 한 마리만 그려져 있어도 대접받는다. 이것저것도 아니면 머리라도 깍두기로 짧으면 좋을 것이다.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하듯 모든 질서는 힘으로 통하는 세상이 이곳이다. 이런 곳일수록 눈만 아래로 깔면 편해진다.
밖은 시끄럽다.
서로 잘났다고 난리다. 화장으로 가리고, 옷으로 치장하고, 승용차 뒤에 숨고, 사는 곳의 평수로 얼굴을 대신한다. 우열이 가려지지 않으니 출신, 학벌, 혈연, 지연을 모두 총망라하여 미분 적분을 한다. 계산이 어렵다 보니 저마다 다른 셈법으로 자신의 서열을 높여 놓아 네 맞다 내 맞다 시끄러울 수밖에 없다. 원시인들의 셈법은 복잡하지 않다. 한눈에 척 알아보고는 무릎을 꿇어야 할 곳에서는 얼른 꼬리를 내린다.
‘치타’는 참으로 부실하다.
새鳥 다리를 하고 중앙에는 무게가 잡히지 않는 번데기 하나 달랑 달았다. 바로 퉁기면 악기 소리라도 날 듯한 갈빗대에 건빵 한 개 몫도 안 되는 팔뚝살 하며, 늘어진 뱃가죽은 노인네 젖이다. 고릴라 옆에서 잠을 청해 본다. 잠이 달아난다. 열 받는 곳에서 열을 내 보지만 깡마른 몸에서 나올 땀이 없다. 저건 내 위이고 저것도 위고 아무리 재 보아도 내 아래란 없다. 자연스레 매겨진 서열에 모처럼 마음이 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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