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이 달라지다
석현수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다.
많은 소출을 거두었기에 마음속으로는 곳간을 새로 짓고, 거기에다 모든 곡식과 재물을 모아 두기로 마음을 먹었다.
이때 하느님의 소리가 있었다.
“어리석은 자야,
오늘, 네 목숨은 내가 되찾아 갈 것이다. 네가 죽고 나면 곳간의 재물은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루카 복음 12장 16)
오늘은 매년 하는 정기 신체검사일이다.
지난해는 유난히 지인들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많아 신검을 앞둔 마음이 즐겁지 않다. 병들 사람이 따로 있고 죽을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설마 나는 아니겠지 하지만 언제 부름을 받을지 누가 알 수 있으랴.
“어리석은 자야, 오늘이 너의 마지막 신체검사이니라.”
마음이 사뭇 찝찌름하다.
아내에게 동행을 청했다.
큰 수술도 아닌 신검을 가면서 평소에 하지 않던 행태다.
늘 혼자 잘 다니다가 갑자기 웬 응석이냐는 듯 의아해했지만 마지못해 응해 주는 모습이었다.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이나 건널 사람처럼 집을 나선다.
혹시나 무슨 일이 있더라도 놀라지 않았으면 좋겠다며 운을 띄웠다. 딴에는 지난해 위내시경 검사 때 일러준 종양 하나가 무척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종양은 암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의사의 말이 내 귀를 맴돌고 있었다.
자식 출가 다 시켰고 환갑도 지났으니 평균수명은 채운 것 같아 크게 아쉬울 것도 없을 것이라며 겉으로는 여유를 보이고 있으나 하늘나라 문전에라도 서 있는 듯 속마음이 초조하다.
싱거운 이야기라도 듣듯 아내는 딴전이다.
죽을 사람같이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단지 15분>이란 단편 소설이 생각났다.
이야기 속의 청년은 생명이 15분밖에 남지 않은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는다. 뜻밖의 충격에 어리둥절하다, 그만 5분을 허비해 버렸다. 이제 남은 시간은 10분이었다. 병실로 한 통의 전보가 날아왔다. 억만장자였던 삼촌이 방금 돌아가셨으며 그의 재산을 상속할 사람은 당신뿐이니 급히 상속 절차를 밟으란다. 잠시 후에 다른 전보를 받는다. 박사학위 논문이 최우수 논문으로 선정되어 논문상을 받게 됨을 축하한다는 내용이다. 절망에 빠진 그에게 또 하나의 전보가 날아왔다. 이번에는 그토록 애타게 기다리던 연인에게서 온 결혼 승낙이었다. 15분이 지나고 그는 숨을 거두었다. 억대의 유산도, 박사학위도, 결혼 승낙도 그의 생명을 보장해 줄 수가 없었다. 운명의 시계를 멈추게 할 수 있는 세상 복락은 없었다.
검사대 위에서의 경과 시간은 15분 정도가 못 되었다.
이 시간에 내 손 전화에 들어와 있는 연락들이란 얼마나 싱거운 것들인지. 당신은 얼마까지 무담보 대출이 가능하다는 정체불명의 스팸메일이 제일 먼저 도착했고, 동창회 신년 모임에 꼭 참석하라는 것이 두 번째 문자메시지였다. 어느 것 하나 아쉽고 애석한 일들이 아니다. 운명도 나 같은 사람하고는 장난을 치기 싫은 모양이다. 억만장자의 유산도, 결혼 승낙의 흥분도 없는 무덤덤한 짧은 시간이 지났을 뿐이다.
정오가 되기 전에 신체검사가 끝났다.
내시경 결과도 걱정할 것이 없단다.
아내의 표정도 밝다.
갑자기 새로 태어나는 느낌이다.
걱정하던 내 곳간을 둘러보니 쌓아올린 명예도 그대로 있고 재물도 제자리에 있다. 15분이 아니라 15년 정도는 더 살 것 같은 자신감을 가진다. 할 일이 많아지고 욕심이 발동하기 시작한다. 써 놓은 글들을 정리하여 책도 내어야 하고 제 명대로 살려면 운동도 부지런히 해야 하겠지.
생각이 달라지니 세상도 달라진다. 쇠털같이 많은 시간의 부자가 되어 여유로움을 보인다. 손이나 한 번 잡아 보겠다며 아내를 앞세우던 아침나절의 사람은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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