著書/말을타고(2012)

사문출유四門出遊

온달 (Full Moon) 2015. 4. 16. 08:53

사문출유四門出遊

 

석현수 

 

 

 

 

친한 친구의 결혼식이라도 거리가 멀면 망설여진다. 끝내기 혼사라니 가보지 않을 수도 없고 가려니 서울과 대구 거리가 만만치 않다. 말이 서울이지 경기도 성남이라면 꼭두새벽에 집을 나선대도 돌아오면 하루해가 깜빡할 것이다. 

마음 정하기 어려운 때에 대구에서의 부고 소식이 날아들었다. 암으로 투병생활을 하던 후배 하나가 명을 달리했단다. 일전에 전화 한 번 냈더니 그 부인이 받아 상태가 많이 좋아지고 있다기에 희망을 가지지 않았던가. 뒤에 한번 시간을 내서 들르겠다는 내 약속도 마다하고 서둘러 세상을 떠나버렸다. 이렇게 빨리 떠날 줄 알았더라면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보고 보냈어야 할 것을, 정말 사람 행세 다 못 하고 사는 것 같다. 두 건의 큰일들이 한꺼번에 생겼으니 길이 머느니, 가느니 마느니 할 것도 없다. 내일 새벽 출발이다.

하필이면 혼사 날에 초상이라니 기분이 묘하다. 그러나 저 세상 가는 일 또한 친구의 혼사 못지않게 큰일이니 후배를 원망할 수가 없다. 결혼이야 사전에 청첩이 있었던 것이지만 세상 뜨는 일이야 갑작스러운 하늘의 부름이니 어쩔 수 없는 도리가 아닌가. 두 가지 일을 하루 일정으로 소화해 내기로 했다. 축하祝賀와 애도哀悼라는 감정 기복이 제대로 살아나 혼가나 상가 양쪽에 맞갖은 예를 다할 수 있을까 걱정이 따랐다.

조문하고 결혼식을 갈 것인가, 아니면 축하부터 하고 문상을 할 것인가? 어느 것이 먼저든 간에 내 성의가 달라지는 건 아니지만, 어릴 때부터 보아왔던 어른들의 방식을 따르기로 했다. 혼사가 있는 집에서는 초상집 문상을 삼갔으니 길사에 앞서 흉사를 본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은 것 같았기에 마음이 정할 때 친구의 예식장부터 먼저 찾기로 했다.

여러 곳을 다녀보아도 친구의 혼사만큼 훌륭한 주례사를 본 적이 없다. 전직이 직조공장 사장 출신인 줄은 몰라도 청실홍실을 촘촘히 엮어 갔다. 한 번 묶어 놓은 것은 하늘도 풀지 못할 것 같았다. 신랑 신부가 해야 할 부부의 도리에서부터 시부모와 며느리, 장인·장모와 사위 간의 관계에 이르기까지 오르락내리락해 가며 비단같이 아름다운 말씀을 하였다. 돈을 내고서라도 와서 들어 봄 직한 주례사였다. 홀을 가득 메운 꽃들은 울긋불긋 화려한 모습으로 식장의 품격을 높여 주었으며 어지간히 말씀이 길어졌다 싶었을 때 주례는 두 사람을 하객들 방향으로 돌려세웠다. 신랑 신부 행진이다. 처음 한두 걸음이 서툴렀지만 이내 익숙해졌으며, 스무 발치의 거리에서 행진을 마쳤다. 이런 보속步速이라면 둘이 평생을 걸어가도 지치지 않겠다는 자신감을 내비쳤다. 추억의 장면들이 수없이 사진기 속으로 박히고 있을 동안에도 신랑 신부는 오늘의 설렘이 평생을 통해 오래오래 지속하기를 빌고 있는 듯했다.

예식장과 장례식장의 거리는 차로 십 분 남짓의 거리다. 짧은 거리를 이동하면서 결혼식장에서의 흥분을 걷어내려 무척 애를 썼다. 비록 대상은 다르지만, 인연의 첫출발과 끝자락을 함께 보아야 하는 묘한 하루다. 하얀 국화송이 속에 빠끔히 얼굴을 내밀고 있는 망자의 사진을 보니 너무 늠름해 죽을 사람 같지 않았다. 후배의 나이를 가늠해 보았다. 꼭 십 년 후배이니 쉰 중반이다. 떠나보내기는 너무 이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절을 받는 쪽이 선배일세.”

후배는 나의 말 걸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턱을 당기고 엄숙해 있었다. 병마가 길었던 터이라 집안일은 어느 정도 교통정리를 해 놓았지 않았을까 싶지만, 먼 길 떠날 준비가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늘의 뜻이 아니면 풀리지 않으리란 매듭이 풀린 걸 보니 그의 죽음은 하늘이나 원망할 일이다. 인연의 끈 한 자락을 놓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을 후배를 생각하니 더욱 마음이 저리고 아프기 한량없었다. 추월하여서라도 선배 되어 내 절 먼저 받고 싶지는 않았을 텐데.

동서남북의 성문을 드나들며 인간이 태어나고 죽어가는 일련의 과정을 둘러보고 인생의 허무를 깨달아가는 ‘싯다르타’의 마음이 이랬을까 싶었다. 사문출유四門出遊를 떠올렸다. 결혼식장에서 올랐던 흥분의 열기도, 장례식장에의 침울했던 마음도 모두 하루 만의 일들이었다. 한동안 풀어져 있었던 마음을 온탕 냉탕 담금질하는 사이, 사는 것이 전광석화電光石火 같다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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