著書/말을타고(2012)

예술에 대한 기대

온달 (Full Moon) 2015. 4. 16. 09:03

예술에 대한 기대 

 

석현수 

 

 

 

 

 

 

간판에 내걸린 글 한 구절이 나를 슬프게 한다. ‘예술이 가난을 구할 수는 없지만, 가난을 위로할 수는 있습니다.’ 이는 명동 성당 뒤편에 있는 창고극장의 간판 글이다.  

 

 

아직도 예술가는 가난할 수밖에 없는가? 위대한 작품들은 모두 가난과 역경에서 나왔다는 것을 생각하니 예술과 가난은 불가 원不可遠의 관계 같기도 하다. 가난하니 예술밖에 할 수 없었는지, 아니면 예술을 하므로 가난하여질 수밖에 없는지 모르지만, 예술에는 가난이 그림자같이 따라다니고 있다.

모차르트는 젊은 나이에 빚과 병마에 시달리다가, 운명을 예감이라도 한 듯 <진혼곡>을 마지막으로 남겼다. <해바라기>, <별이 빛나는 밤> 등 명화를 남긴 고흐는 가난과 고독에 시달리다 생을 마감하였으니 그도 역시 젊은 나이였다. 우리의 김소월 시인은 또 어떠한가? 유명한 예술가들은 하나같이 요절하거나 가난을 달고 다니던 사람들이다.  

  

 

이 나라의 십 년은 성장 속도가 느린 나라의 100년에 해당한단다. 입에 풀칠도 어려웠던 지난날 예술가의 모습이 풍요로워진 오늘에도 달라진 것이 없는 걸 보면 유독 예술 분야만 발전 속도가 느린 것일까? 배가 고파 죽었다는 여류 작가의 이야기가 신문에 소개되었다. 병마와 가난에 맞서야 했던 작가의 생활은 비참하기를 넘어 처절했다. 18세기 모차르트나 19세기 고흐의 이야기가 아니라 21세기 경제 대국 대한민국에 있는 예술가의 현주소가 이런 것일까 해서 마음이 편치 못했다. 예술은 아직도 가난을 구하지도 못하고 있기에 삼일로 고갯길 언덕에 내다 걸린 간판은 고갯마루 장승처럼 서서 오는 이 가는 이를 향해 가난을 하소연하고 있는 것이다. 단조로운 돋움체로 한 뼘 남짓한 넓이에 옮겨 적은 글에서는 절로 궁핍이 묻어나고 있다. 

 

 

나는 글을 쓴다. 나는 예술가인가? 나도 분명히 예술의 한 끄트머리를 잡고 선 사람임은 틀림없다. 그러나 예술가가 되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에서는 두 가지 결격사항이 있다. 우선 배고파 본 적도 없고 요절하지도 못했다는 것 때문에 순도가 떨어진다. 글을 쓰기 전에도, 그 후에도 넉넉하지 않기는 마찬가지여서 생활이 신통찮은 것은 예술이 주는 가난 때문이 아니라 오직 내 재테크가 서툴렀음을 잘 알고 있다.

이순의 나이에 인생 2모작의 시기를 맞아 글쓰기라는 조그만 텃밭을 경작하는 경우이니 어찌 큰 소출所出로 생계와 연결할 수 있으랴. 퇴직 후 나이 들어 입문하는 예술은 생존의 단계인 먹고사는 것을 해결하려는 방편이 아니라 마스로우의 5단계 (생존-안정-애정-존경-자아실현) 중 뒷부분의 것들이 주된 것이어서 가난으로부터는 조금 비켜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나물이나 푸성귀 정도의 작품을 돌보고 있으면서 언젠가는 대작으로 위로받을 수 있기를 기다리는 사람이다. 문학을 업으로 어렵게 이 분야를 지켜낸 가난한 예술가들에 대한 존경만은 늘 잊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목숨 걸고 달려들 생계형의 문학이 아니니 작품의 질에 매달리고 싶으며 그냥 풀뿌리 문인의 지위를 지키고 살고 싶다. 문학가의 겸손 형이 문학인인가? 수필가隨筆家의 겸손 형이 수필인隨筆人인가? 스스로 ‘家’를 ‘人’으로 불렀으면 하는 마음이지만 우리말 사전 어디에도 없는 겸손 형과 당당 형을 새로 지어낼 수는 없는 일이니 늦게 배운 도둑질(?)도 그냥 도둑이라 불러주면 좋겠다. 나도 예술가이며 예술로부터 위로받고 있는 문학인이다.  

 

 

배고프다는 소리가 곧 없어지려는지 반가운 소식들이 전파를 타고 온다. 우리 예술가들이 외국에서 대접받는다는 소식이다. 프랑스도, 영국도 모두 한류가 몰아치고 있어 파란 눈의 젊은이들은 서툰 한국어로 K-Pop에 열광하고 있단다. <겨울 연가>의 주인공은 이웃 나라 쓰나미 재해 복구비로 몇 억을 쾌척했다는 기사도 나온다. 연예인이나 유명작가들의 생활이 매스컴에 화려하게 소개되고 있다. 개미보다는 베짱이를 칭송하는 젊은이들이 늘고 있다. 이런 추세를 몰아 예술가는 숙명적으로 가난을 안고 태어난다는 말이 얼른 고전古典이 되었으면 좋겠다. 언젠가 삼일로 고갯길에 내걸린 간판도 화려한 네온사인으로 바뀌어서 오가는 길손을 위로하는 자막이 흘러갈 것을 기대해 본다.

“예술이란 풍요로운 삶을 보장하는 지름길이다.” 예술의 명과 암이 뒤바뀌는 시기를 앞당기어 그려 보고 있다. 

 

 

《서라벌 문예》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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