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향기를 탐하다
석현수
문학관 두 곳을 거쳐서 오는 길이라 일행의 마음은 은연중 문향聞香에 취해 있었고 몸에서는 매화꽃, 국화꽃 내음이 물씬했다. 매창, 미당 두 시인을 하루에 만나 보기에는 가을 해가 너무 짧았다. 저마다 문학 기행의 진수에 탐닉하여 조용한 분위기가 오래 갔으나 귀갓길에 이르렀어야 서로 말을 섞기 시작했다.
무릇 글 쓰는 사람은 살아생전에 꽃하고는 한 번 쯤 인연을 맺어 놓아야 죽어서 꽃밭에 둘러싸일 수 있지 않겠느냐는 형님 한 분의 제안에 옆자리의 동료 몇몇이 공감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매창 문학관에서는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임’이 우리를 반갑게 맞았고, 미당 문학관에서는 서정주 시인의 누님같이 생긴 국화꽃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방문객을 반기었다. ‘국화 옆에서’라는 미당의 시 때문에 시인의 생가가 있는 고창 진마 마을은 국화꽃 고장이 되어 버린 것이다.
매창梅窓은 조선 선조 때 부안의 명기 이향금(李香今. 1573-1610)의 호이다. 호가 의미하는 바가 매화梅花 꽃이 드리운 창窓 쯤이 아닐까 생각해 보니 더욱 운치가 있고 정감이 간다. 매창은 황진이, 허난설헌과 함께 조선 3대 여류시인 중의 한 사람이며 매년 5월이면 그녀를 기리는 매창 문화제가 이곳 문학관에서 열리고 있다. 벚꽃, 복사꽃, 살구꽃에 둘러싸인 전북 부안의 모습은 상상만 해도 봄 흥이 절로 솟아날 것 같은 느낌이다.
미당의 생가에는 국화 축제라도 벌인 듯하여 맞은편 돋음 볕 마을에는 기와지붕 위에도 토담 벽에도 국화 그림이 그려져 있고, 들판에는 작은 빈 둔덕만 보여도 국화를 가꾸어 놓았다. 꽃을 노래하고 살다 간 시인의 삶이 부럽기도 하지만 죽어서도 꽃향기에 둘러싸여 눕다니!
그대라면 어떤 꽃 속에 묻히고 싶은가? 우리도 매창이나 미당의 기분에서 꽃을 골라보기로 했다. 한 분이 진달래를 이야기했다. 큰 점수를 주지 않았다. 왜냐하면, 진달래는 이미 김소월 시인이 선점해 버린 꽃이란 이유에서다. 아쉽긴 하다. 봄날이면 산야에 지천인 이 꽃을 한 사람을 위해 양보를 해야 하다니.
다음 사람이 무궁화를 제안했다. 기발한 착상이라며 모두 선호했지만, 마음이 쓰이는 부분이 없진 않다. 나라의 꽃이고 피어 있는 기간도 길어서 좋겠지만, 애국지사도 아닌 주제에 무궁화 꽃동산에 누워 있기란 여간 부담스럽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수명 백세 세대라면 아직도 갈 길이 먼데 살아생전에 의사義士로서의 행적을 쌓거나 아니면 무궁화를 주제로 많은 글을 쓰면 될 것 아니냐는 말로 무궁화도 괜찮겠다며 점수를 주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삼생육도三生六塗의 삼생은 전생과 현세에 이은 내세를 뜻한다. 육도는 죽어 우리가 가는 길이다. 지은 업보에 따라 때론 동물로 윤회하는 축생도도 있고, 극락으로 가는 천상도도 있다. 기독교의 중심사상도 육신의 부활이며 천국이라는 내세를 굳게 믿고 있다. 이승에서의 삶이 제대로 되었는지에 따라 가을 추수 때에 알곡과 가라지처럼 천당이나 지옥으로 갈 길이 각각 달라진다.
죽으면 영혼은 어디론가 떠나야 한다. 묻힌 자리에 가만히 누워있는 것은 흙으로 돌아가려 진행 중인 부패한 몸뿐이다. 자연으로 돌아가고 있는 육신은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며 향내도 맡을 수 없다. 제아무리 산세가 좋고 새들이 지저귀며 꽃이 만발한 명당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영혼은 멀리 떠나고 없을 텐데.
시인 로세티는 자기 무덤가에 아무 장식도 허락하지 않았다. 설령 그 자리에 묻혀 있다 한들 주검에 감각이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서다.
“내 무덤엔 장미도, 그늘을 위한 소나무도 심지 마세요. 난 그늘도 모르며 비가 온대도 느낌이 없을 거예요. 두견새 괴로움에 구슬피 울어본들 그 소리 또한 듣지 못할 거예요.”
- Christina Georgina Rossetti (1830-1894) 영국의 여류시인
매창은 매화 향기를 즐기고 있을 것인가?
미당은 가을 국화 향기에 취하여 있을 것인가?
그곳을 찾는 방문객들의 눈과 코는 즐거웠을 테지만 정작 두 문학관의 주인공인 시인들에게 매화와 국화의 향기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꽃향기를 탐하여 죽어서도 꽃밭에 둘러싸이고 싶다는 것은 산 사람의 부질없는 욕심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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