著書/꽃보다개(2013)

벌 바둑의 변

온달 (Full Moon) 2015. 4. 17. 09:16

 

 

벌 바둑의 변

 

체계적으로 배우지 못한 것 앞에는 ‘벌’이란 접두어를 붙인다. 그렇게 좋은 의미가 아니어서 대충 또는 설렁설렁 배웠다는 뜻이다. 아무튼 나는 벌 바둑이다. 어깨 너머로만 배우면 절대로 실력이 늘지 않는다고 한다. 바둑에 있어서는 어쩌면 평생을 가도 ‘벌’자를 떼기 어려울 것이다.

급수로 치면 몇 급이나 될는지? 이런 급수가 있는지는 몰라도 10급은 넘을 것이다. 그렇더라도 바둑에서 자주 아이디어를 얻는다. 글을 쓰기 위해, 아니면 경영에 관한 교육을 할 때다. 자주 써 먹는 이야기가 ‘我生然後殺他아생연후살타’이다. 나부터 살고 나서 남의 것 넘겨다보라는 말이다. 바둑판에서 귀동냥 한 것이지만 공자님 말씀만큼 교훈적이어서 눈 여겨 볼 만한 경구다. 이런 말 하면 당신 바둑 얼마나 두느냐는 질문을 받는다. 몇 년이란 경력도 없고 몇 급이란 급수도 모른다. 그냥 웃어넘길 수가 없어서 두어 가지 더 주워다 섬긴다. 두 점 머리는 두들겨라, 붙이면 젖혀라 정도를 안다고 한다. 아리송한 응수로 ‘벌’자가 떨어진 사람인 체하는 것이다.

취미 생활이라고만 생각한 것이 잘못이었다. 바둑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잡기 정도가 아니었다. 체계적으로 배우고 실전에서 익혔더라면 좋았을 걸 때 늦은 후회다. 공부하느라 배울 기회가 없었다거나 산다고 바빴다는 말은 지금 와서는 통하지 않는다. 박사공부 한 교수들일수록,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CEO일수록, 바둑 고수가 더 많다.

친구 하나가 기원을 냈다. 동창들이 친구 사업도 도우고 친목도 도모하자며 기우회를 결성했다. 나는 이들과 어울리지 못한다. 사는 데 지장이 없다고 등한시 했던 바둑이 바로 나의 아킬레스 근이 되어버렸다. 바둑 장애자는 기피성 인물이다. 벌 바둑은 상대의 재미마저도 앗아가는 재수 없는 사람 취급을 받는다.

공항에서도 판을 벌인다는 고 스톱도 칠 줄 모른다. 선친께서 직접 가르쳐 보겠다고 명절 때마다 시도했으나 불가능 판정을 받았다. 서양 화투인 트럼프도 마찬가지다. 양쪽 모두 짝을 맞출 줄 모른다는 결론을 지으셨다. 화투는 바둑에서의 ‘벌’ 대신 ‘민’자가 붙는다. 초등학생도 쳐다보지 않을 민화투가 내가 아는 전부다. 간신히 길을 물어 찾아가는 민화투로는 친구들과 같이 어울릴 수 없다.

벌 바둑을 두면 꼼수만 는다고 했다. 꼼수도 기술일 거라고 했더니 그게 아니란다. 바둑을 같이 두면 상대의 성격도 알 수 있어 꼼수 자주 튀어나오면 인간성이 훤히 내다보인다고 했다. 사람대접 받으려면 정석으로 배워서 하란 말이다. 4귀에서 살아 남기에 급급한 쪽인 나 같은 벌 바둑이 있는가 하면, 중앙으로 뻗어나가 듬성듬성 말뚝만 꽂아 놓아도 나중에는 자기 집이 되는 친구도 있다. 하늘과 땅 차이다. 나야말로 태산에 오를 생각을 하지 않고 뫼만 높다며 친구들의 기량만 쳐다보는 위인이다.

골프를 잘 치는 선배를 부러워했던 적이 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한테만 골프 치라고 별도의 시간이나 돈을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은 부러워하기 전에 당신은 얼마만큼 골프에 공을 들였는지를 생각해 보라는 암시였다. 잡기는 잡스런 기술이어서 슬슬 하다 보면 세월이 해결해 주는 줄 알았다. 골프마저도 낙제 점수의 벌 탕이 골프를 치고 있다.

바둑도 벌 바둑, 화투도 벌 화투, 골프도 벌 골프. 그러나 벌자가 붙지 않아도 되는 것이 하나 있으니 등산이다, 전문산악인에 비한다면 등산마저도 벌 등산이겠지만, 다행히 등산에는 그런 용어가 아직 없다. 산책이거나 들놀이 정도이니 벌 등산은 없다. 아슬아슬한 재미와 이기고 지는 승부의 맛은 없어도 같이 어울릴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다. 배우기 위해 별도의 시간과 돈이 필요하지 않으며 기술을 요하지 않아서 좋다. 그냥 입과 귀를 열어두고 발걸음을 내디디면 그만이다.

 

바둑이 등산처럼 쉬우면 얼마나 좋을까? 생수 한 병에 김밥 한두 줄이면 마음 놓고 따라 나설 수 있는 그런 유의 바둑이 그립다. 건장하고 총명한 젊은 시절 다 보내고, 머리를 써도 따라잡을 수 없는 그런 나이가 되어서야 바둑을 짝사랑하게 된다. 바둑 5불가론을 앞세우며, 태조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처럼 기고만장했던 옛날이 생각난다. 1. 폐쇄 공간에서의 놀이다. / 2. 담배를 많이 피운다. / 3. 이기고 지는 것은 휴식이 아니라 작은 전쟁이다. / 4. 허리를 구부리고 논다. / 5. 시간 죽이기다. 모두 안될 이유만 열가하고 있었으니, 될 일도 안 되게 되어있다. 평생을 벌 바둑 소리를 듣고 살아야 할 운명이다.

잡기가 사람 사이를 연결해 주는 다리라는 것을 지금에서야 절실히 느낀다. 잡일과 중요한 일이 조화를 이룰 때 삶에 활기가 생긴다고 했다. 큰일만을 하겠다면 결국 큰일조차도 못하게 된다. “지난 몇 년간 휴가 한 번 가지 않았을 정도로 열심히 일하고 있다는 것을 자랑 삼지 말라.” 이는 Inland Container Corp. 창립자, Herman Krannert 의 말이다. 만약 내가 짬짬이 바둑이나 둘 수 있는 여유를 가졌더라면 지난 인생에서 더 큰 그림을 그릴 수 있지 않았을까를 생각해 본다. 부질없는 생각일까? 그러나 확실한 것은 나의 노년이 훨씬 더 즐거움을 더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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