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생연분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 천생연분이다. 결혼식장에서 ‘하늘이 맺어준 짝’이란 소리를 너무나 많이 들어서 천생연분이란 대부분이 ‘부부’를 말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사실은 부부는 천생연분이 아니다. 하늘이 짝지어 내려보낸 것이라기보다는 두 사람이 제 눈의 안경으로 서로 고르고 고른 결과물이다. 하늘이 맺어준 인연처럼 귀하게 여기고 살라는 주례의 강조 말씀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천생연분은 두 가지다. 부모와 자식 간 인연과 형제간 인연이 그것이다. 자기가 태어나고 싶은 부모를 골라잡아 태어나지 않았듯, 형제 또한 서로의 협의를 거쳐 형, 아우로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이 두 인연이야말로 하늘이 맺어준 것이다. 부모와 형제가 천생연분임을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불행하게도 그 자리를 다른 것들이 밀치고 들어가 우선순위가 우르르 무너져 버렸다. 나이 든 부모가 애완견 다음으로 추락하는 경우가 그러하고, 있는 집안 없는 집안을 불문하고 부모가 남긴 유산으로 법정 송사로까지 번지는 형제들의 경우를 보면 더욱 그러하다.
하늘의 뜻을 거스르면 천벌을 받는다고 했다. 부모님께 불효하거나 형제간끼리의 반목질시反目嫉視는 곧 하늘의 뜻을 거역하는 일이다. 이런 짓을 눈만 뜨면 저지르고 살고 있어도 죄의식조차도 없다. 식은 죽 먹듯 자주 거스르다 보니 면역이 생겨나 아예 천륜일지라도 인간의 힘으로 끊어 버리고 산다. 부모와 자식이 원수가 지고 형과 아우가 남보다 더 못한 타인으로 살아가는 경우는 얼마나 많은가.
‘부부’라는 준 천생연분도 탈이 많이 나긴 마찬가지다. 옛날은 검은 머리가 파 뿌리가 되기까지 평생을 유효기간으로 삼았지만, 지금은 신혼여행을 갔다 오면서도 헤어지는 ‘공항의 이별’이 있을 정도다. ‘부부’란 정품 천생연분이 아니라 주례가 지어낸 준 천생연분이어서 천만다행이다. 만나고 헤어짐의 인연이 헤프기 짝이 없으니 천생연분인들 성할 리 있겠는가.
부모·형제에 관한 한 어느 집안이나 성한 곳이 없다. 뚜껑만 열리면 오만 가지 일그러진 모습들이 판도라 상자의 괴물로 튀어나온다. 차라리 낳지를 말았어야 하는 자식이라며 부모 되기를 포기하는 때도 있다. 신문의 사회면을 장식하는 그날그날의 크고 작은 사건 사고 중 부모·자식, 형제간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들이 빠지는 날이 없다. 천벌을 하늘에서 내린다면 천생연분 때문에 하늘은 또 얼마나 바빠질까?
천벌이 두렵지 않느냐는 말도 겁나지 않는다. 천벌은 죽은 후에나 받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살아서 받는 가장 낮은 단계의 과태료 정도로도 여기지 않는다. 외상이라면 소도 잡는 인간들이 아닌가.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천벌은 후불이 아니라 철저히 직불 방식으로 해 놓았다. 부모가 제 부모에게 하는 매사를 자식이 보고 자라서 자식은 부모가 가르쳐준 그대로 답습하게 되어 있다. 형제간의 우애도 마찬가지다. 효자 집안에 효자 나고, 왕대밭에 왕대 나도록 해 놓았다.
내가 한 만큼을 되돌려받는데 누가 가혹하다 할 것인가? 그러고 보니 천벌이란 하늘이 내리는 벌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에게 내리는 자업자득의 벌이다. 때로는 눈물 젖은 빵을 먹어야 하기도 하고, 고독한 침상에서 울면서 근심에 찬 밤을 지새울 수도 있을 것이다. 천생연분이란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굴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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