著書/美世麗尼(2018)

LES ESSAIS』서문에서 멀어지는 한국 에세이

온달 (Full Moon) 2018. 1. 30. 13:43

『LES ESSAIS』서문에서 멀어지는 한국 에세이  

 

 

서론:

 

‘에세이’는 서양에서 들여 온 것이다. 우리말 번역이 ‘수필’이 되는 바람에 에세이 이해에 혼선이 적지 않았다. 에세이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무엇보다 에세이의 기점이 된 몽테뉴Michel de Montaigne의 『LES ESSAIS』를 출발점으로 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몽테뉴가 표방하고자 하는 『LES ESSAIS』의 성격을 가장 이해하기 쉽게 그의 글 서문에서 밝혀놓고 있기 때문이다. 몽테뉴 이후 400년, 오늘 한국의 에세이는 몽테뉴의 첫 시도로부터 어떤 편차를 가지고 있는지를 스스로 진단해 볼 필요가 있다.

 

본론

 

1. 에세이의 시작

 

에세이(essai)는 '시도' 또는 '실험'의 뜻을 가진 프랑스어다. 영어의 essay는 프랑스어의 essai에서 온 말이다. 그러면 몽테뉴는 무엇을 실험하고자 했을까? 다행히 『LES ESSAIS』서문에서 글 성격을 스스로 밝혀 놓음로서 그의 실험이 무엇이었는지를 독자들이 미리 감지하도록 안내해 주었다. 그 실험은 “자신을 소재로 한 글”을 써서 내놓는 것이었다. 독자들의 반응은 매우 뜨거웠고 실험은 대 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에세이는 글쓰기의 한 형태로 자리 잡았다.

 

2. 고유명사가 되어버린 에세이

 

이후 에세이 쓰기는 실험의 의미를 완전히 떠나 고유 명사화가 되어 글쓰기 한 형태로 자리매김하였다. 좋은 예로 프랑스 몽테뉴『LES ESSAIS (1583)』로 시작하여 영국의 베이컨Francis Bacon의 에세이집 『Bacon 에세이 (1597)』에 이어 찰스 램Lamb의 『엘리아 에세이Essays of Elia (1823)』으로 이어진 에세이의 인기가 이를 증명해 주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몽테뉴의 에세이는 문장의 한 형태로 대를 이어가고 있음을 뜻한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에세이다운 에세이를 쓰는 일만 남았다. 이는 곧『LES ESSAIS』의 서문을 가이드라인으로 한 에세이를 의미한다. 에세이의 어원이 실험이었다고 해서 연구 발전이란 명목하에 에세이를 마음대로 재단裁斷하려 드는 것은 분야를 위해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발묘조장拔苗助長의 일에 지나지 아니할 것이다. 에세이는 너도 한번 해보고 나도 한번 해보는 실험실 시험편이 더는 아니다. 몽테뉴는 에세이를 처음 시작한 사람이자 성공으로 마무리 지었던 사람이다. 백가쟁명百家爭鳴 의 에세이 이론 현상은 한국 문단에서만 볼 수 있는 기이한 현상이다.

 

3. 잡기에 관한 마음 편한 이해

 

에세이를 모독하는 단어 중에 ‘잡기雜記’가 있다. 잡기란 ‘잡스러운 글’이라는 풀이까지 더하여 혐오감을 증폭시킨다. ‘잡기’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업신여김의 뜻은 아무 데서도 찾아 볼 수 가 없다. ‘잡’은 영어의 ‘miscellaneous’이다. 이는 형용사로 주로 명사 앞에 써서 여러 가지 종류라는 뜻이며, 이것저것 ‘다양한’의 의미를 가진다. 서양의 문학 장르 구분에도 ‘에세이’가 ‘miscellaneous’ 로 분류되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자유분방함과 소재의 다양성은 금기 사항으로 기피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장려할 일이다. 위 2항에 언급된 몽테뉴, 베이컨, 찰스 램 등은 자유분방함과 다양성을 통하여 자신들의 잡기를 내보임으로써 당대 문단을 선도했던 대가들이 되었다.

 

4. 서문에서 보인 ‘에세이’ 얼개

 

몽테뉴『LES ESSAIS (1583)』의 서문을 이해를 도우려 짧은 전문을 그대로 옮겨 적는다.

 

“이 책을 읽는 이에게. 이 책을 읽는 이여, 여기 이 책은 성실한 마음으로 썼음을 밝힌다. 이 작품은 처음부터 내 집안일이나 개인적인 일을 말해 보는 것밖에는 다른 어떤 목적도 있지 않았음을 말해둔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의 호평을 사기 위한 것이었다면, 나는 자신을 좀 더 잘 장식하고 조심스레 연구해서 내보였을 것이다. 모두 여기 생긴 그대로의 자연스럽고 평범하고 꾸밈없는 나를 보아주기 바란다. 왜냐하면, 내가 묘사하는 것이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내 결점들이 여기에 그대로 나온다. 터놓고 보여줄 수 있는 한도에서 타고난 그대로의 내 생김을 내놓았다. 그러니 이 책을 읽는 이여, 여기서는 나 자신이 바로 내 책의 재료이다. 1583. 3. 1.

 

5. ‘에세이’ 이론의 허와 실

 

살펴본 바와 같이 몽테뉴의 실험 성공 이후 긴 역사가 흘렀음에도 우리 문단은 아직도 초기의 실험 정신으로 새로운 에세이를 꿈꾸고 있다. 한국 문단에서만 있는 기이한 현상이다. 나름대로 만들어 낸 에세이 이론들이 봇물을 이룬다. 이는 에세이란 글쓰기를 장애물 경주로 만들고 문턱만 높일 뿐이다. 주요 논란이 되는 몇 가지 주장들의 허와 실을 살펴보기로 한다.

 

가, 원고지 몇 매 분량이라는 제한 사항

 

가) 허

여러 사람의 글을 묶어 함께 실어야 한다는 사정이 있다. 그러나 어느덧 이것이 체질화되어 에세이라면 원고지 15매 또는 13매라는 말이 공론화되어있다. 이런 현상은 개인 작품집에서도 그대로 나타나 작가 스스로가 묵시적으로 15매의 족쇄에 묶인다. 자신의 경비로 에세이집을 출간하면서도 자로 잰 듯 길이가 같아서 들쭉날쭉한 것이 없다.

 

나) 실

몽테뉴의 수상록에서는 글의 길이에 제한이 없다. 몇몇 페이지의 짧은 글도 있고, 대단히 긴 글도 있다. 처음부터 분량의 제한을 두지 않았다. ‘레이몽 스봉의 변호’ 의 경우는 무려 200페이지가 넘어 책 한 권으로 따로 만들어도 될 만한 많은 분량이다. 원고지로 몇 장은 여러 사람의 작품을 묶어서 펴낼 때 편집원들의 요망사항일 뿐이다. 에세이는 길이와 관계없는 글이다. 편의상 요구하던 것이 습관으로 굳어져 버린 짧은 글쓰기가 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

 

나. 신변잡기에 대한 과민 반응

 

1) 허

‘에세이’와 ‘신변잡기’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떼어 놓아야 한다며 고집을 부리는 사람들이 많다. 신변잡기가 에세이에 누를 끼치는 것인 양 과민반응을 보인다. 복숭아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은 복숭아를 먹지 말아야 한다. ‘신변잡기’에 알레르기가 있는 사람은 에세이 쓰기에 부적합한 사람이다.

 

2) 실

몽테뉴는 자신의 에세이를 노골적으로 신변잡기임을 자처하고 있다. 이 이상으로 더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에세이는 주변 잡기를 주요 소재로 하는 문학이다. 신변잡기는 에세이의 출발점이다.

 

“이 작품은 처음부터 내 집안일이나 개인적인 일을 말해 보는 것밖에는 다른 어떤 목적도 있지 않았음을 말해둔다.” -몽테뉴

 

 

다. ‘붓 가는 대로 쓰는 글이 아니다.

1) 허

한동안 유행했던 ‘붓 가는 대로’라는 글쓰기 구호가 어느 날 갑자기 추방당했다. 隨筆의 한자어가 따를 隨 붓 筆에서 나왔다는 이유에서다. ‘붓 가는 대로’도 위의 신변잡기에 못지않게 푸대접 중이다. 심지어 ‘붓 가는 대로’ 앞에 ‘아무렇게나’ 또는 ‘생각 없이’를 더하여 ‘붓 가는 대로’의 모함 수위를 높이고 있다.

 

2) 실

‘붓 가는 대로’의 반대쪽 말은 ‘아무렇게’ 또는 ‘성의 없이’가 아니다. 누가 영혼 없는 글을 아무렇게나 쓰려고 책상머리에 앉아 불을 밝힌다는 말인가? 오히려 ‘붓 가는 대로’의 반대는 ‘무리’나 ‘억지’일 것이다. ‘붓 가는 대로’란 무리나 억지가 없는 자연스러운 글쓰기 형태를 말한다. 필자는 隨筆의 한자어가 수시로 隨 와 적어놓을 筆로 보고 있음을 밝혀둔다. 가식을 배제하고 동시에 체면치레를 삼간다면 글은 자연스러움이 묻어날 것이다. 이것이 몽테뉴가 바라는 에세이 쓰기다. 『LES ESSAIS (1583)』에서의 몽테뉴 서문이 다음과 같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의 호평을 사기 위한 것이었다면, 나는 자신을 좀 더 잘 장식하고 조심스레 연구해서 내보였을 것이다.” -몽테뉴

라. 3인칭 에세이도 가능하다는 주장

 

1) 허

꼭 1인칭인 ‘나’에 관한 글쓰기가 되어야 할 필요가 없다. 타인의 경험이나 생각을 소재로 삼는다 하여도 ‘나’는 ‘다른 이’의 이야기를 자기화하여 쓰면 될 것이 아닌가. 글을 쓰면서 재료를 제대로 잡지 못할 때 3인칭에 대한 유혹은 더 심하다. 친구의 이야기가 기구하여 내가 그 친구의 이야기를 빌려다 적는다면 어떠할까?

2) 실

에세이 쓰기가 아니라면 무엇인들 못 하랴. 불행하게도 에세이는 처음부터 ‘1 인칭’인 ‘나’의 글로 태어났다. 몽테뉴에 의한, 몽테뉴 자신의 이야기 (1인칭)로 출발한 것이 에세이의 출발이다. ‘1 인칭’ 글이 쓰기 싫어서 타인의 이야기를 쓰고 싶다면 차라리 소설을 쓰면 될 것을 ‘에세이’에서 소설을 찾으려 한단 말인가. 이는 동식물의 암수를 바꿔놓는 생체실험처럼 불가한 일일 것이다. 몽테뉴는 『(LES ESSAIS』의 서문을 이렇게 마치고 있다.

 

“이 책을 읽는 이여, 여기서는 나 자신이 바로 내 책의 재료이다.”

-몽테뉴

 

마. 아방가르드Avant garde 와 에세이

 

1) 허

아방가르드Avant garde 시도는 음악, 미술 등 타 분야에서 진행되었던 변화 바람이었다. 에세이에서의 아방가르드Avant garde 시도 또한 환영할만하다. 시대에 앞서고자 하는 노력을 나무랄 일만은 아니다, 글자 한 자로도 시라고 내놓는 판에 에세이는 늘 주절주절 하고만 있을 수 없다. 현대인의 바쁜 일상을 생각해 긴 쪽보다는 단 몇 줄이 더 오래 인상을 남길 수 있을 것이다.

2) 실

아방가르드는 지금부터 한 세기 전인 20세기 초의 예술 운동이다. 21세기에 들어선 지금에는 이미 예술 혁신이 일반화되어 오늘날에는 쓰지 않는 용어중 하나다. 서양에서 사라진 지 오래인 아방가르드Avant garde 구호가 지금 와서 한국의 에세이 앞에 매달 필요성이 있을까? 내용 면에서 ‘에세이’가 전위니 행위예술하고는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다. 짧은 에세이로 시를 흉내 내기보다는 아예 처음부터 시를 쓰면 되지 않을까? 원고지 5매 이하라는 겉모양새 하나로 ‘전위’ 또는 ‘행위예술’이란 수식어를 앞에 붙이기에는 너무 궁색하여 오히려 민망하다.

 

결론

 

글에 대한 실험은 몽테뉴『LES ESSAIS (1583)』로 종료되었다. 이후는 영국의 베이컨, 찰스 램Lamb을 거쳐 문단에 한 장르로서 탄탄하게 자리 잡았다. 에세이는 이제 상용어가 되어 대 호응을 받으면서 지금에 이르고 있다. 한국 문단에서는 아직도 에세이의 발전적인 방향을 모색하겠다는 구실로 저마다 실험치를 내놓고 있다. 분명한 것은 에세이는 복잡한 이론이 필요로 하지 않는 글쓰기다. 『LES ESSAIS』가 에세이의 전범典範이기에 더 가감해야 할 이론이 따로 필요하지 않는다. 논란으로 삼고 있는 몇 가지를 지적하여 ‘에세이’ 원전과의 편차를 살펴보았다. 결국 한국 ‘에세이’의 바람직한 발전 방향이란 새로운 이론 개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몽테뉴의 『LES ESSAIS)』의 얼개를 충실하게 따라서 에세이를 쓰는 일일 것이다.